우리나라엔 산성(山城)이 많다. 대부분은 땅따먹기가 잦았던 삼국시대에 지어진 것인데, 적이 쳐들어오면 평지에 있는 주민들이 성 안으로 대피하고 그 안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다. 세계는 재편되고 땅따먹기는 좀더 세련되고 차가운 물밑 작업으로 대체된 지금, 우리는 15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이 성곽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충북도는 내륙 7개 산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보은 삼년산성, 청주 상당산성, 단양 온달산성, 충주 충주·장미산성, 괴산 미륵산성, 제천 덕주산성 등이다. 7개 산성은 지난해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전단계인 잠정목록에 등재된 상태. 그 중 걸어서 돌아보기 좋은 보은 삼년산성과 청주 상당산성에 다녀왔다.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경관 자체가 세계 어느 유적지 못지않다. 색색의 나비와 산새들을 만나는 건 덤이다. 두 산성은 40분 거리에 있어 하루에 돌아보기에도 무리가 없다.
청주 상당산성 남문에서 서문 쪽으로 오르고 있는 사람들. 멀리 보이는 것이 걷기가 시작되는 남문이다. 성벽 아래쪽으로는 넓고 푸른 잔디광장이 펼쳐져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날은 화창했다. |
보은 삼년산성
삼년산성을 맞닥뜨리면 일단 거대한 높이와 두께에 놀란다. 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우리나라 산성 중 제일이라 꼽았는지 알 것 같다.
높이가 13~23m에 달한다. 우리가 익히 봐왔던 산성들의 높이가 5~6m 정도. 성벽의 규모 자체가 보통 산성의 두어 배는 된다. 두께도 마치 넓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두꺼워 이국적이다. 성벽은 거대하지만 위압적이진 않다. 오히려 고즈넉하다. 걸어서 40분이면 모두 돌아볼 수 있다.
시작은 서문지(西門址). 서문 쪽 성벽은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외부의 화강암을 가져다 새로 쌓은 탓에 돌 색깔이 무척 희다. 남문 쪽으로 오르면 점차 옛 성의 색이 드러난다.
보은 삼년산성의 ‘폐허의 미학’. |
신라시대의 대표적 산성인 삼년산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약 2000여개 산성 중 유일하게 축조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470년 신라 자비왕 13년에 처음 석성을 쌓고 16년 뒤인 서기 486년에 장정 3000여명을 동원해 중축, 서기 742년 경덕왕 원년에 비로소 완성됐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로선 이곳이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전략 거점이었다. 경상·전라·충청이 모두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어느 쪽도 진출할 수 없었다. 삼년산성은 삼국통일까지 단 한번도 공략되지 않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고 한다.
넓은 초지와 연못 아미지(蛾眉池)가 있는 흰 화강암의 서문지를 벗어나면 그야말로 ‘유적’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성벽은 옛 모습 그대로 허물어져 있고 발 밑에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은 듯 풀이 무성하다. 색색의 산새들이 날아다니며 산딸기와 산버섯도 곳곳에 고개를 내민다.
남문지 쪽에 이르면 성벽도 장마에 웃자란 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보은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올라가다보면 돌 무더기가 쌓여있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이게 보은 화강암이다. 보은군청 정유훈 학예연구사는 “이제 보은 화강암의 확보가 어렵다. 보은 주변에 택지를 조성하면서 그런 돌이 나오는 대로 성벽 복원에 쓰려고 모아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동문지에선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수해를 입은 서문지와 달리 축조 당시의 유적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발굴 가치가 크다. 장마철이 지나고 8월 이후 다시 조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정유훈 학예사는 “30여년 동안 성벽 보수에만 치중했는데 지금은 문화재청에서도 성벽 외부의 대규모 복원은 자제하고 있다”며 “앞으로는 성내 편의·관람시설을 마련하는 쪽으로 정비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상당산성에서 처음 시가지 전망이 펼쳐지는 곳. |
상당산성은 타 지역 사람들에겐 낯설지만, 청주 주민들에겐 인기 나들이 장소다. 산성 입구인 남문까지 차가 들어가 슬슬 걸어 1시간이면 성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남문 곁에는 넓은 잔디 광장이 펼쳐져 있어 소풍가기도 좋다.
장마철, 예보와 달리 날이 화창하게 개었다. 간편한 트레킹 복장의 주민들이 삼삼오오 산을 오르고 있었다. 성곽을 따라 걸어도 되고, 곁의 소나무 숲길을 택해도 된다. 남문에서 서문쪽으로 10분 정도 가파른 성벽을 따라 오르니 이내 청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서문까지는 줄곧 구불구불한 성곽을 따라 탁트인 조망이 펼쳐진다. 도시 한가운데 이런 산성이 있다는 건 현대를 사는 지역민들에겐 축복이다.
상당산성은 백제시대부
터 토성이 있던 것으로 짐작되는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산 정상부터 계곡 아래쪽까지 감싸안은 큰 규모로, 성벽도 깨끗하게 잘 정돈돼있어 단정하다.
의외의 발견은 ‘나비’였다. 간간이 벌과 함께 발견되던 나비들은 서문 근처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꽃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모두 나비다. 흰 나비, 호랑나비, 노란 나비, 파란 나비 등 색색의 나비들이 곳곳의 꽃밭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다.
막 서문을 지나 한참을 걸어왔을 때, 하늘은 파란데 천둥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굵은 장대비로 바뀐다. 폭우엔 나무 그늘도 소용없다. 속수무책으로 산성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뛰었을까, 멀리 성벽에 뚫린 굴다리가 구원처럼 빛나고 있다. 흠뻑 젖은 채 그 안에 들어가 비를 피한다.
비가 잦아들고 굴 밖으로 나왔는데 산골마다 비안개가 자욱한 것이 장관이다. 터덜터덜 걸어 동문에 이르렀다. 젖은 몸을 말리고 있는 등산객 몇이 보인다. 그 곁에 흰 나비 하나도 젖은 날개를 말리고 있다.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보고서야 구원같은 굴다리가 바로 동암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암문은 요즘의 비상구와 같은 개념인데, 유사시 사람과 물자가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 둔 것이다.
동문에서 마을로 걸어내려오니 카페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마을이 이렇게 지척에 있는 줄 누가 알았겠나. 쫄딱 젖은 꼴로 카페에 들어섰는데, 사람들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남문에서 바라본 청주 일대 산세. |
●삼년산성=청원~상주 간 고속도로-보은IC-보은읍-보은군청 주변 산성 이정표. 주소는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11월까지 매주 금·토·일요일 삼년산성 내 야외체험부스에선 대장간 체험 행사가 열린다. 직접 쇠를 달궈 망치로 두드려 기구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입장료와 체험비 모두 무료. 체험 신청·문의 보은대장간 (043)543-7212, 삼년산성 문의 (043)540-3392
●상당산성=경부고속도로-청주IC-청주-36번국도-우암산순회도로-상당산성 남문 앞 주차장. 주소는 청주시 상당구 성내로 70(산성동 180번지) 문의 (043)220-2227
기자가 걸은 코스는 남문~남암문~서문(미호문)~동암문~동문~산성마을~동장대~남문. 약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상당산성 주변엔 국립청주박물관, 우암어린이회관, 청주동물원 등 볼거리들이 있다.
<경향신문 2011. 7. 20>
출처 :우리문화탐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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