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시조辭說時調를 찾아서/김문억
ㅁ 시조 탄생의 배경
사설시조를 이야기 하자면 먼저 평시조의 탄생 과정과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바로 사설시조 이야기로 넘어간다면 이야기를 건너뛰거나 아니면 중복될 우려가 있어 이해하기에 혼란스러울 수가 있다
시조 형식의 틀 잡기는 고려 후반기로 보지만 모든 학문은 그 주변에 깔려 있는 유사한 사회성과 역사성을 연관지을 수 있는 것으로 멀리는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려의 별곡이나 조선 시가 가락의 길고 짧음에서 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조의 3장 형식은 고려 후반기 이전에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인쇄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여 구전되던 것을 후대에 와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청구영언을 비롯한 후대의 문집에서 삼국시대나 고려 전기시대부터 작품이 보였다고는 하지만 후대인의 누군가에 의한 의작으로 보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 3 행의 시가 형성되어 오는 동안 사회상의 변화나 정치적인 굴곡 속에서 사대부들의 구미에 맞거나 필연적인 당위에 따라 지금과 같은 견고하고 분명한 틀로 나타났던 것이다
배운 것을 드러내던 식자층이 세도문화에 탐닉하여 질탕한 놀이로 세월 좋던 궁중 문화에서 멀리 벗어나 낙향하여 은거하고 있던 비주류의 선비들에게는 때 맞춰서 품위 있는 형식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우리말이 본디 한 마디에 한 마디를 더하면 한 소절이 된다 그 말 마디는 대부분 주어에 서술어로 이어지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런 문맥을 이어가게 되어 있다.
태산이/높다하되.
이렇게 이어진 한 소절과 한 소절이 모여서 한 장을 이루었다.
태산이/높다하되/하늘 아래/뫼이로다.
그런 반복으로 3 장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줄에 와서 첫 마디는 모자라는 듯 되는 듯 3 이라는 홀 수 축으로 묶어 놓고 다음 마디는 기준 음절 수 초과로 5를 앉힌 후 마지막으로는 3.4를 4.3 으로 반전해야 하는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다.
3.4.3.4 로 만 반복되어 오던 리듬을 결구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줄에 와서 엄격한 반전으로 휘몰아친 곡조는 우리 가락의 멋이면서 당시 선비들이 향유하던 풍류의 극치였다 . 그것은 미류나무 숲 길을 휘젓고 가는 선비들의 도포자락이었고 산 모롱이를 안고 돌며 휘몰아치는 물소리였다.
사람이/제 아니 오르고/뫼만 높다/하더라
그렇게 종장 첫 토막을 더 짧게 끊을 수도 없고 더 길게 늘일 수도 없는 구름판을 3 이라는 홀수로 못을 치고 둘 째 토막에서 더 길게 끌고 싶어 머뭇거릴 수도 있는 말을 단호하게 마무리 했다. 그렇게 맺고 끊는 멋으로 시조가 단지 석 줄짜리 3 행 시詩가 아니라는 뚜렷한 특징을 주었다. 그래서 시조는 한 행行이라는 단순 의미가 아니라 한 장章이라는 큰 의미로 이름 지어진 것이다. 자유시로 비유 한다면 한 연聯의 의미와 같다
ㅁ. 시조의 형식과 홀수문화
우리는 시조의 형식을 이야기하면서 3 장이라는 것과 종장에서 반전되는 리듬의 멋스러움을 종종 이야기 하고 있지만 어떻게 그런 모양으로 시조의 틀이 짜여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이 부족했다
여기서 우리는 3 이라는 홀수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종장의 3.5.4.3에 나타나는 홀수의 정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우리 민족의 생활 습성을 중심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홀수 중에서도 특히 3을 선호하는데 3이라는 숫자 뿐만 아니라 1.3.5.7.9 모두가 우리 생활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홀수다
우리의 생활 관습을 가만이 들여다 보면 우리는 홀수 생활권에서 살고 있다고 하겠다.
우선 국경일 이라든가 명절이 모두가 홀수다. 게다가 절기가 거의 홀수 날에 들어있다
설날과 추석이 그렇고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이 그렇고 음력이든 양력이든 모든 절기가 대부분 홀수 날에 들어 있다. 정월 대보름 삼진 날 단오 칠석 백중이 그렇다
홀수 달에 겹친 같은 홀수 날도 좋은 날이다
정월 초하루 1월 1일은 물론이고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절 7월 7일은 칠석이다. 9 월 9일은 구일이라 하여 남자들은 시를 짓고 여자들은 가정에서 국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11 월 11 은 작대기가 너무 많은 탓인가 죽은 날로 취급했으니 우리조상들의 해학이 참말로 요절복통할 일이다
하지만 요즈음에 와서는 11월11일을 빼빼로 날이라 하여 빼빼로 과자 판매에 이용되고 3 월 3일을 삼겹살 먹는 날이라고 한다니 참으로 얄팍한 상술에 이용되고 있는 멋쩍은 해학이라고 하겠다.
생활 곳곳에 깊이 자리 잡은 3의 의미는 더욱 다양하다
사람이 죽으면 3 일이나 5일 장을 치르는 것이 보통이지 4 일 장은 없다. 역시 삼우제三虞祭 라는 것이 있고 49 제라는 것이 있다. 망자 앞에서는 홀수 날을 택하여 최대의 예우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심지어 제물을 올려도 홀수로 올리지 짝수로는 차리지 않는다.
애기를 낳아서 금줄을 쳐도 세이레(三七日)동안 출입을 금한다고 했다. 즉, 스무 하루다
신성한 새 생명에 부정이 있을까 하여 삼신三神 할미가 출입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봉투에 돈을 넣어도 우리 서민들은 두 자릿수가 아닌 이상 3 만 원 아니면 5만 원을 넣었지 4 만 원이라든가 6 만 원짜리 기부 촌지는 보기 힘들다. 딱 맞아 떨어지는 수는 많든 적든 넉넉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듯 3 이라는 숫자가 생활 중심에서 축을 이루고 있다.
심지어 옛날에는 역적을 몰아 낼 때 3 족三族을 멸한다고 했다. 춥고 긴긴 겨울을 삼동三冬이라 했고 무더운 여름을 지나려면 삼복三伏 을 넘어야 한다.
무리를 일컬어 삼삼오오 三三五五 라 했고 색깔을 이야기할 때도 삼원색三原色이 근원이다
상고上古 시대에 우리나라 땅을 마련 해 준 삼신三神이 있다 하여 생명 줄로 섬긴다.
삼재三災가 있는가 하면 또 삼재三才가 있다
현대에는 시위문화에서 삼보일배三步 一拜라는 것이 새로 생겼다.
가까운 이웃을 일컬어 삼이웃이라는 좋은 표현이 있는가 하면 잘하면 술이 석 잔 못 하면 뺨이 석대도 있고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삼세번이야 한다
경기를 해도 5판 3승제를 하며 만세를 불러도 삼창三唱을 했다.
불교에서는 하늘 땅 사람을 이르러 삼계三界라 했고
천주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신을 삼위三位라고 했다
짝 수는 죽은 자의 숫자란 말이 있고 홀수는 산 사람의 숫자란 말이 있다. 그래서 제사 때는 절을 두 번 하지만 산 사람에겐 절을 한 번만하면 된다.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야만 목적한 것이 이루어진다는 논리는 생활 속 곳곳에 있다.
이렇듯 3을 축으로 하여 표현하는 우리말은 얼마든지 있다. 그만큼 3이라는 숫자는 우리 생활의 디딤돌이요 구름판이었다
그러면 우리민족은 왜 홀수를 선호하게 된 것일까. 어쩌면 딱히 짝 지어진다는 것은 늘 마음에 없었을 것이다. 아귀가 척척 맞아 떨어지기보다는 좀 더 넉넉한 생활 습성에서 기인 된 것은 아닐까
때문에 셋 넷을 말하는 것마저 서넛이라고 했다. 같은 숫자이면서도 훨씬 더 넉넉해 보인다. 그 위에 한 개쯤 더 얹으면 더욱 좋고 한 개쯤 빠져도 아무 유감이 없는 표현이다
아마 덤 문화도 여기에서 기인된 것 아닐까
정부에서 아무리 정찰제를 권장해도 뿌리 깊은 덤 문화는 값을 깎고 실갱이 하는 것에서 실거래 값이 매겨진다. 그런 습관이 비록 저울에 근을 달아서 팔더라도 한 주먹 더 얹어 주어야만 서운치가 않지 그렇지 않으면 야박하다고 한다.
홀수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3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은 확실히 넉넉함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어쩌면 그것은 德과 仁의 사상에서 유래 된 것이리라.
ㅁ 우리 말이 갖는 짜임과 묘미
이렇듯이 우리 민족의 홀수문화 생활 관습은 오랜 동안 닦여진 삶의 밑바닥부터 터 잡은 것이며 그 당시에 시조의 틀이 3장으로 이루어지면서 종장에서 리듬의 반전으로 좋은 가락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초,중장에서 리듬의 반복은 종장의 반전을 위한 아주 음흉스런 말 놓기였으며 더도 안 되고 덜도 안 되는 종장 첫 마디 3의 확고한 묶음은 리듬의 반전을 위한 완고한 구름판이면서 시조 전체를 균형 잡는 축이라고 하겠다.
둘째 어절에서 역시 5 라는 수로 묶어 둔 것은 앞에 놓은 3과 조응할 수 있는 리듬으로 그 이상으로 늘어나서도 안 되며 그 이하로 줄어들어서도 가락이 안 맞기 때문이었다. 종장의 마지막 구 역시 3.4로만 이어지던 리듬을 4.3 이라는 역순으로 앉힐 수 있었던 것은 앞 구에 3.5 라는 반전을 보완해 주는 입장에서 편안하게 안착하기 위함이다.
체조 경기 종목의 뜀틀 경기와 비유해 본다면 어떨까
초,중장의 3.4 반복 리듬은 종장의 반전을 위한 도움닫기에 속한다. 멀리뛰기나 높이뛰기를 위한 구름판까지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종장의3 은 구름판에 속하고 5는 높이 뛴 몸을 비틀어서 고난도의 기술을 보이는 연기라고 하겠다. 마지막 착지에서 무릎을 굽혔다가 펴는 안전한 자세는 뜀틀 경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착지가 불안전하면 점수를 많이 깎인다. 실지로 지금 나오는 시조 작품에서도 아무 까닭도 없으면서 종장 뒷 구를 3.3 같은 불안전한 착지로 끝내는 경우를 보는데 딴에는 자연스럽게 쓰겠다는 품신이지만 시조의 기본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겠다.
이렇듯이 시조를 잉태하는 세포 조직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깊이 배어 있는 생활 습관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한민족의 혼이 배어 있는 우리만의 가락으로 시조는 탄생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물레를 돌리면서 고치를 길게 뺐다가 어깨 쯤에서 한 번 휙 휘감치면서 실을 감는 몸짓이었고 어여쁜 처자가 그네를 뛰기 위해 발판을 힘껏 차고 올라 저 멀리 창공에서 하늘거리는 아카시아 잎새를 입술로 똑 따서 내려오는 모습과 무엇이 다르랴
ㅁ 시조는 수난의 역사였다
오늘 날 시조를 읽지 않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처음 시조가 탄생한 뒤로 시조문학이 격어 왔던 역사를 거슬러 가 볼 필요가 있다.
시조가 탄생하기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피 속에는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의 흥얼거림이 면면이 흘러내려 왔다.
농사를 하면서 노래가 있었고 짐승을 잡으면서도 노래가 있었고 그리움과 이별 속에서도 노래가 있었고 심지어는 사람이 죽어서도 노래가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변이된 형태로 이어져 왔다.
그런 흥얼거림의 노래가 나올 수 있는 바닥에는 말릴 수 없는 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흥이 많은 민족이다. 흥이 없이 어찌 노랫가락이 나올 수 있으며 흥이 없이 어찌 민족 문화가 발전 해 올 수 있었겠는가
그런 역사를 안고 별곡이나 가사 같은 리듬의 가락이 생활 속 깊숙히 자리잡을 수 있었으며 그런 가락이 치고 올라오면서 시조는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조 자체가 갖고 있는 태생이 양반 계급에서 출발을 했기 때문에 그 저변확대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어려운 역사를 갖고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조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식자층의 전유물 이었으며 기껏해야 그네들의 유흥을 맛 내기 위한 기녀들의 문학이 전부였다
지필묵에 의한 시조 한수를 놓고 주고 받는 창의 노래였으며 그런 행위는 연회장이나 잔치같은 선비들 사회에서나 가능 했던 것이고 아니면 그네들을 상대해야 하는 기녀들에게는 필수 교육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시조가 노래를 떠나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갈래지면서 읽는 글이 되었고 읽는 글과 노래하는 창으로 갈라지면서 양 쪽 다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양반 계급에서 출발한 시조는 평민들에게 침투하여 저변이 확대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양반과 평민의 계급이 조금씩 흔들리는 혼란기를 맞으면서 3장 6 구의 견고한 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판소리 사설은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그 특유의 소리로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장르로 성장했다. 그러나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간 시조창은 갈라져 나간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더욱 인기 없게 했다.
그 후에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 가는 혼란스러운 때에 카프문학을 비롯한 문학 사상으로 시조의 무용론이 대두되면서 시조 옹호론자들은 시조를 부흥 시키자고 했고 그런 이유에서 시조도 연작을 써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자유시 쪽에서는 갑오개혁 이후에 일어난 문학. 개화사상에 따라 서구의 문예 사조를 받아들여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갖게 되었다. 그런 신문학이 도입되면서 자유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할 때 시조는 그에 맞서 연작을 쓰기 시작했고 여기서부터 창과 한 번 더 떨어지게 되었다. 시조의 단수는 간결하면서 생략의 미가 있었지만 두 수 세 수 연작으로 표기 했을 경우 반복되는 리듬이 읽는 사람을 재미없게 만들었다.
그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신문학을 받아들인 자유시에 비해서 전통성만 강조했을 뿐 서정 일변도와 신변 이야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창작 내용이 시 독자를 자유시에 빼앗긴 가장 큰 원인으로 생각한다
실은, 시조가 창과 인쇄물로 갈래진 것과 연작으로 변한 것 보다는 내용의 변화를 꾀하지 못한 것이 더욱 큰 부진을 가져왔다. 세상만사가 다 시적 대상일진대 태생적으로 선비문학에 뿌리를 둔 보수적 시각은 과감하게 다양한 시상詩想을 수용하지 못했고 잘못 인식된 전통 문화에 대한 답습으로 인하여 현대시조마저 그 늪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불리한 조건을 갖고 21세기를 맞은 시조문학은 인터넷이라는 정보화 시대를 맞으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된 독자들의 구미를 따라 갈 수 없었고 세월이 갈수록 현대인에게 외면당하게 되었다.
시조문학이 갖는 틀의 정의定義
우리는 흔히 시조를 정형시라고 해서 3장 6구 12 마디의 리듬 구조 겉모습을 한 틀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켠 정형이비정형定型而非定型이라 한다. 이는 시조가 엄격한 외형의 틀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이 원천적으로 갖고 있는 신축적인 리듬 조직체로서의 내재율을 말하는 것이다
리듬의 의미구조를 적절하게 규정하면서 자유의지로 언어의 가감을 조율하여 가락을 살릴 수 있는 특성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의 특성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조뿐만 아니라 한국시 전반적인 골격이기도 하다. 더불어 시조문학이 갖는 한국적인 정조의 흐름은 시대적 사회적인 공간이라는 한계를 뛰어 넘어 오늘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조를 3장 6구의 겉모양만 보는 것으로 정형시라고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고시조 한 수 감상 해 보자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이실 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절창이다. 지금까지 애송되어 왔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의 심금을 울려 줄만한 고시조 한 수다. 초장의 배열을 보면 2.5.2.6으로 기본 숫자 3.4.3.4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소리 내서 읖조려 보면 기본 가락에서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치렁치렁한 가락이 살아나고 있다. 한 수 더 보자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타야
보내고 /그리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위 작품에서도 분절되는 형식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숫자 배열이 아니다. 이는 기본율에 충실하면서도 율조의 변형이면서 또한 정형이다. 오히려 능청거리는 가락의 묘미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부분이 있다. 기본 글자 수는 어긋나게 표기 되었어도 두 낱말이 조응하는 한 句의 완성은 완벽하다. 더구나 황진이의 작품 대부분이 앞 구 보다는 항상 뒷 구를 좀 더 길게 늘여 줌으로 해서 가락을 한껏 살리고 있다.
그 뿐만 아니다 자칫 놓치기 쉬운 매우 뛰어난 가락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초장을 길게 뺐을 경우 중장에 가서 짧아지고 초장이 짧게 출발 했을 경우는 중장에 가서 길게 받쳐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결구라고 할 수 있는 종장에 가서는 제 자리로 완고하게 돌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소겻관대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업네
추풍에 지는 닙 소?야 낸들 어이 하리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 내어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情)이
녹수(綠水) 흘러간들 청산(靑山)이야 변할손가
녹수(綠水)도 청산(靑山)을 못니져 우러예어 가는고
청산리(靑山裡)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수여간들 엇더리.
구태어 황진의 시조를 인용하는 것은 당시의 여타 시조에 비하여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 지금껏 국민시로 애송되고 있거니와 앞으로도 계속 애송될 수 있는 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역시 읽는 시조로서의 말 맛이 뛰어나면서 우리의 마음밭에 묻혀있는 정한을 무한히 일구어 놓았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다분히 우리말의 말 맛을 한껏 다룰 줄 아는 작가라는 말이 된다. 어느 작품을 봐도 위에서 언급했던 리듬의 관계를 맺고 풀어 주는 테크닉으로 시조의 정수精髓를 말 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시조는 분명 우리말을 엮어 나가는 말의 조타수가 노저어 가는 가락의 노래다. 앞 구와 뒷 구 또는 앞 장과 뒷장끼리의 풀고 맺는 장단長短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율조의 민족시라 하겠다
아직도 많은 수의 시조 작가나 학자들이 단순히 기본 숫자를 지키지 않으면 파격을 했다고 해서 시조가 아니라고 한다. 하면서 무엇으로 자유시와 구분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것은 시조의 기본부터 잘 모르거나 무시하는 처사다. 말을 넣고 빼는 것만 가지고 파격을 했다고 해서 정수定數를 지키지 않는 것은 시조가 아니라고 하는 그네들의 작품집을 읽고 있으면 참말로 딱딱하기 짝이 없다. 시종일관 자수에만 충실하고 있는 나머지 타악기의 경음악을 듣는 기분으로 가락은 다 어디로 가고 글자만 남아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런 이유들이 오늘의 시조를 어렵게 만들고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파격이란 이론적으로 말하기에 앞서 써 놓은 시조를 시조라고 하는 인식을 갖고 소리 내서 읽어 보면 가락이 엇박자로 잘 안 읽혀지므로 해서 시조가 전체적으로 균형이 안 잡히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은 말 마디 하나가 더 끼어들었거나 필요이상의 조사가 덧붙여진 경우다.
위의 경우라면 내용이나 구성 면에서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으리만큼 절창으로 지어진 아래 작품 역시 글자 수를 파격 했으니 시조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시적 분위기가 갖는 주제 의식에 맞는 문맥이면서 내용도 당당하지만 표현 기법도 당당하다. 자칫하면 사설조가 될 뻔하도록 길게 뽑아 준 초장에서 장수의 기개가 한없이 나타나 있다. 그러면서도 아슬아슬하게 한 장으로서의 가락이 넘치지도 않았고 중장에 가서는 오히려 기본 가락보다 더 짧게 앉혀 주므로서 초장과의 대응 관계를 잘 조화 시키고 있다 그런 후에 종장에 가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숫자와 가락을 같이 살려 냈으니 나라를 지키고 있는 장수의 기개만 넘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곳 거칠 것이없는 시조문학의 꽃이다.
ㅁ 왜 사설시조인가
왜 사설시조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에 앞서 왜 시조는 읽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진단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매우 특별한 언어 감각으로 짜여진 민족시 이면서도 오늘 날 읽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詩이면서 자유시에 비해서 시조를 안 읽는다는 것은 분명 어떤 이유를 안고 있는 것이며 그 이유 찾기가 타당한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처방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름대로 그 이유를 짚어 보자면 시조와 시를 비교 해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상대적인 비교 분석에서 몇 가지 답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시조문학이 안고 있는 몸 자체 DNA에 있다고 나는 감히 진단하고 싶다. 즉 이는 지금껏 시조문학의 우월성을 누누이 강조해 온 전통문학으로서의 반복되는 리듬의 가락을 지적하고자 한다. 3.4.3.4--3.4.3.4-- 3.5.4.3 이라고 하는 기본율에서 나오는 단순한 반복 리듬이 현대인에게는 지루하고 재미가 없게 되었다. 시조의 참 맛이 종장에서 휘감치는 가락의 반전에 있고 몇 자는 파격을 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찌했든 시조 작품은 똑 같은 모양의 3장 6구 안에 들어 있는 제한된 형식을 갖고 있다.
반복 리듬은 음악성을 갖고 있지만 똑같은 반복은 사람을 졸리게 한다. 할머니의 등 뒤에서 애기를 가장 빨리 재울 수 있는 것은 '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애기 잘도 잔다' 라는 노래를 불러주는 일이다. 유사한 시조가락이다. 이런 시를 읽는다는 일은 작품의 문학성을 따지기 이 전에 시조의 몸체가 갖고 있는 틀의 문제다.
우리는 지금껏 시조문학의 우월성 내지는 유구한 역사만 강조하면서 시조를 외면하고 있는 독자를 탓했지만 사실 우리 자신이 한 발쯤 뒤로 물러나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지 못했다. 그것은 연구하는 교수나 평론가에 앞서 시조 창작을 하는 작가 자신이 먼저 짚어보아야 했던 문제다. 수백 년의 역사성을 강조했을 뿐 자신을 향해 왜 라는 질문을 용기있게 하지 못했다. (시조예술 전 호에 발표)
물론 성리학이 도래되면서 시조문학이 융성하던 조선시대는 갓 끈을 동여맨 엄한 질서의 유교사상 틀 안에서 시조문학은 딱 맞아 떨어질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시조는 군말이 필요치 않고 간결하면서 삽상하고 완고하면서 튼튼해야 했다. 응축과 생략은 행간의 깊은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뜻 전달이 멋스러워야 했다. 그것이 식자층의 선비 문학, 시조의 태생적 DNA다. 시조는 그렇게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문학 장르다. 솔직히 자랑할 만한 독특한 전통 문학으로 오래도록 사랑 받아 왔다
그런데 지금은 시조를 잘 읽지 않는다. 큰 서점에서 시조 책을 찾기 어렵고 신춘문예에서 시조부문이 없어지고 있다. 학생들 교육 현장에서 시조가 사라지고 있으니 이래저래 시조문학을 접할 기회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지금은 21세기 정보화 시대, 디지털 시대다. 다양하게 빨리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시문학 역시 설정되는 주제는 물론 내용의 다양화는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언어와 언어끼리의 충돌과 반전, 아이러니는 물론 동화나 시나리오 소설적 요인까지 도입되면서 산문화 되는 경향도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에는 언어의 미학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상상이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반면에 시조문학의 보수성은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며 변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물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면 안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문학도들은 수백 년 전에 태동해서 같은 모양으로 내려 온 가락의 반복 리듬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반복은 답습에 불과할 뿐 진정한 전통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시조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단수 짓기에 힘써야 한다
시조는 단수가 묘미였다. 단수라야 시조가 갖는 본래의 멋을 마음껏 뽐낼 수 있다. 단수만으로도 창으로 부르기에 충분했으며 외우기도 쉽다. 더구나 시조의 멋이 종장의 반전으로 휘감아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종장에서 온 느낌의 감동으로 끝내야지 다시 연작 읽기로 들어가서 3.4.3.4의 리듬이 반복 된다면 앞서 읽은 종장의 느낌도 희석되면서 경음악을 듣는 기분으로 간결한 생략의 미적 품위를 갖고 있는 단수에 비해서 격이 떨어질 수 있다.
시를 쓰다가 보면 시적 표현의 흥이 도도하여 가슴으로부터 용솟음치는 흥을 어찌 잠재울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다. 잠재우면 되겠는가 흥이 없이 어찌 시를 쓰겠는가. 온몸을 흔들고 나오는 흥에 취해야 하고 취하면서 써야 한다. 이런 경우 작가는 종종 한없는 끼를 느끼게 되는 것이고 그 끼는 어쩔 수 없이 시로 육화 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나온 작품이야말로 흥이 도도할 것이며 독자를 감동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부터 낳는 것이라 했다.
무엇을 쓴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표현의 충동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시조 작가는 시조로 표현해야 하는데 이렇게 탄생한 시조를 독자들이 외면하고 있다면 이쯤에서 어떤 돌파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대안으로 사설시조를 말할 수밖에 없다.
간밤에 자고 간 그 놈 아마도 못 잊겠다
와(瓦)야 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두더지 영식인지 꾹꾹이 뒤지듯이 사공의 성녕인지 상앗대 지르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흉측히도 얄궂어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되 참맹세 간밤 그놈은 차마 못잊을까 하노라
사설시조야 말로 작가적 양심과 능력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대안의 그릇으로 적합하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조문학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대안이다. (시조예술. 2009 년 겨울호)
'◐ 문학 & 예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성 / 김영승 (0) | 2011.08.27 |
---|---|
인생은 나에게 술한잔 사주지 않았다 / 정호승 (0) | 2011.08.26 |
시 쓰기와 자아 찾기 / 이은봉 (0) | 2011.08.20 |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0) | 2011.08.20 |
새로 표준어가 된 단어 (0) | 2011.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