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찾아서
이 승 하
나는 1999년 7월 20일부터 24일까지 중국 여행을 했다. 그 여행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기행문을 써 계간 문예지 {시안}에 싣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윤동주의 출생지인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의 생가와 윤동주가 다닌 학교 중 하나인 길림성 용정시 용문가에 있는 용정중학교(윤동주가 다닐 때의 이름은 은진중학교)를 찾아보고서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썼다. 자금성과 이화원, 만리장성 등 북경 일대의 관광지와 백두산 정상도 밟아보아야 했기 때문에 무척 빡빡한 여행 일정이었다. 그래서 찾아가 보는 것이 무척 까다롭다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윤동주의 묘소는 찾아보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출생지와 학교와 묘소 세 군데는 반드시 답사하고 와서 써야 할 글을 두 군데만 보고 와서 썼기에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는데 다행히도 2003년 10월에 윤동주의 생가와 용정중학교를 다시 방문한 것은 물론 4년 전에 못 가 보았던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보았고,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용두레 우물터와 해란강, 일송정 및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까지 찾아보아 무척 뜻깊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비로소 시인 윤동주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행기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어떤 부분은 지난번 여행기를 인용할 것이고, 또 윤동주의 생애를 완벽하게 복원한 송우혜의 명저 {윤동주 평전} 개정판(세계사, 1998)도 적절히 참고할 것이다.
2003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의 중국 여행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연구하는 팀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한 나는 {토지}의 공간연구 자료수집이라는 일차적인 목표도 중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4년 전의 여행 시에 찾아보지 못했던 윤동주의 묘소를 볼 수 있다는 일정표를 보고 마음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여행 일정은 인천→장춘→연길→용정→권하→연길→하얼빈→인천이었고, 윤동주 관련 여행 일정은 10월 20일로 잡혀졌다.
1. 시인의 생애
묘소 방문기를 쓰기에 앞서 시인의 생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는 시인의 생애가 아주 치밀하게 연구되어 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는 왜 중국에서 태어났던 것일까. 만주는 척박한 함경도 땅과는 달리 농사짓기에 적합한, 아주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었다. 두만강변의 도시 회령과 종성 등지에 살던 네 가문의 대소가 141명이 1899년에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갔으니 대규모 이주였다. 만주 땅에서 농산물을 많이 수확해 좀 잘살아보자는 뜻이 가장 컸다.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그곳에 들어가 삶으로써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어보자,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을 인재를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키우자, 뭐 이런 뜻도 이주민의 마음속에는 담겨 있었다.
명동에는 기독교가 일찍 전해졌고, 교육과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네 가문이 들어간 다음해인 1900년에 한 발 늦게 18명의 식구를 이끌고 명동촌에 들어가 정착했다. 윤하현은 부유한 농부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의 교원이었다. 윤동주는 태어나자마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출생 3개월 전에 고종사촌 송몽규가 태어났는데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된다.
생가는 잘 보존되어 있다기보다는 낡은 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집 안쪽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비문의 표제는 '윤동주 생가 옛터'였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어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4년 룡정촌은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 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 정부와 룡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여기서는 유적지를 '관광점'으로, 문학연맹을 줄여 '문련'으로 쓰는 것 같았다. 연구소를 '연구중심'으로 쓰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표기법이었다. 안내원은 이 집이 윤동주의 생가와 흡사하게 생긴 집을 여기다 옮겨놓은 것이라 했으므로 시인의 체취가 배어 있는 생가는 아니었다. 윤동주는 이 집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31년 늦가을, 용정가 제2구 1동 36호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어린이잡지 {아이생활}과 {어린이}를 구독하면서 시인에의 꿈을 막연히 키워가던 윤동주에게 있어 이 집은 그야말로 '지상의 낙원'이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했다. 소학교 시절,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글'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3월 20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자 친구들과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마침 그 무렵 명동에 공산주의자들의 테러가 성행하여 늦가을에 용정으로 이사를 하고, 윤동주의 용정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윤동주는 1932년 4월, 미션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 12월 24일은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인 시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를 쓴 날이다. 1935년 4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에서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시도하는데 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으로 학년을 낮춰 입학한다. 숭실중학교 학회지에 시 [공상]이 게재되어 최초로 활자화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하자 윤동주는 용정으로 되돌아왔고,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여 1938년 2월에 졸업했다. 한편 1936년 4월,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던 송몽규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는다. 용정중학교 역사전시관 벽에 도표로 그려진 학교 연혁사를 보면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 중학부가 다 용정중학교의 전신(前身)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시인은 이 학교에 5년 반을 다닌 셈이다.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시비가 세워진 것은 1992년 9월 10일이었고, 서울해외한민족연구소와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덕분이었다.
윤동주는 1938년에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기숙사 3층 지붕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한 방을 쓰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1939년에는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지용을 찾아 뵙고 시에 관해 질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0년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이 해에 같이 입학한 경남 하동 출신 정병욱과 친해졌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원고를 잘 간직했다가 광복 후에 시집으로 출간하여 윤동주라는 시인이 있었음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1941년,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12월 27일에 졸업하고는 졸업 후 한 달 반 고향집에 머무르는 동안 부친이 일본 유학을 권유하여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2년 4월 2일, 일본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입학했다. 릿쿄대학에 재학중이던 1942년의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데, 이때 마음이 바뀌어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을 했다. 송몽규가 있는 교토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일 수 있는데, 윤동주의 전학은 죽음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만다.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14일에는 윤동주도 검거되었다. 윤동주는 일제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3월 31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수인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2. 시인의 죽음
시인이 죽은 것은 광복 6개월 전이었다. 교토에 와서 맞은 첫 여름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해 7월 14일 윤동주는 나흘 전에 잡혀간 송몽규의 뒤를 이어 특고경찰(特高警察)에 의해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었다. 특고경찰이란 특별고등경찰을 줄인 말로 사상 감시를 주임무로 하는 특별한 경찰 조직이었다. 송우혜는 윤동주의 검거 이유를 이렇게 추리하고 있다.
그 동안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이니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문화운동'이니 하는 문제들을 놓고 의견을 나누면서, 자신은 앞으로 연극 분야에 투신해서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던 것이다.
일경의 취조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러자 취조관은 일련의 서류를 내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거의 1년 가까이 미행하고 엿들어서 작성해놓은 기록이었다. 어느 달 어느 날은 몇 시에 하숙방 불이 꺼지고, 어느 날 어느 식당에서 송몽규와 윤동주와 고희욱 세 사람이 만나서 함께 회식을 했다든가, 어느 날은 몇 시까지 송몽규의 방에서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그와 나누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소상히 적힌 것이었다.
윤동주는 이처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체포, 구금되었다. 교토경찰서 유치장에서 검사국 감옥의 독방으로 이감되었고,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은 후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았다. 큐슈(九州)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도 그는 독방에 갇혔다. 매끼의 식사는 깡보리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 몇 쪽과 묽은 된장국 한 그릇이 전부였다. 윤동주의 때 이른 죽음은 추위와 허기가 초래한 병 때문이 아니라 생체실험용 주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옥사 통지를 받고 윤동주의 부친과 함께 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가져왔던 당숙 윤영춘의 증언([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나라사랑} 23집, 외솔회)이 있다.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꿈 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는 흐려졌다.
윤동주와 같은 시기에 같은 감옥에서 옥살이를 한 독립유공자 김헌술 씨도 5∼10㏄의 주사를 일주일 이상 맞으며 암산 능력을 테스트 받았다는 생체실험. 일제의 모르모트가 된 시인은 자신의 수인번호를 "모기소리 같은 가냘픈 소리"로 복창해 김헌술 씨는 시인의 수인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이국의 추운 독방에서 외마디소리를 높게 지르고는 운명하였다. 27년 2개월의 짧고도 짧은 생애였다.
3. 윤동주의 묘소
비록 냉전체제였다는 핑계를 댈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1985년 이전까지 윤동주의 묘소가 중국 땅에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윤동주의 묘소는 한-중 국교가 맺어지기 전에는 중국 방문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터라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오오무라 마수오(大村益夫) 교수가 용정에 있는 묘소와 비석의 존재를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하면서 비로소 알려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비문을 쓴 이는 1910년대 윤동주의 부친이 북경 유학을 갔을 때 같이 떠났던 5인의 유학생 중 하나로, 북경에서 돌아온 후에는 윤동주의 부친과 함께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 김석관 선생이었다. 한자로 쓴 비문이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번역되어 있다. 다음은 그 일부.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 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 만했는데, 춘풍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묘소를 새롭게 단장한 것은 현봉학 박사였다. 1988년 6월에 새로이 봉분이 단장되었고, '龍井中學校修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석이 비석 앞에 놓여졌다. 바로 그해 윤동주장학회도 설립되었다.
우리 일행은 소형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기사에게 용정의 동산(東山)에 위치한 중앙교회 묘지 터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를 꼭 가보고 싶다고 간청했다. 기사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면서 산 초입에서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조선족 남자를 한 분을 태웠다. 기사는 여행사 소속인데 윤동주의 묘소를 모른다니, 중국에 관광 오는 한국인 가운데 윤동주의 묘소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일까. 버스는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30분은 족히 달렸다. 그런데 그 조선족 아저씨는 윤동주의 묘소가 어디인지 찾아내지를 못했다. 그는 엉뚱하게 중국인 묘지로 일행을 안내해 우리는 드넓은 공동묘지를 미로를 헤매듯 한참 동안 찾아다녀야만 했다. 한국인의 묘지는 둥그스름하고 잔디가 덮여 있었지만 중국인 묘지는 묘하게도 둥글지도 않고 잔디도 없었다. 우리는 한참을 헤매다 '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을 발견하였다. 일행 중 누군가가 "술을 가지고 올 걸" 하고 말했지만 죽는 날까지 학생이었던 윤동주의 묘에 술을 뿌릴 필요는 없었을 같았다. 우리는 모두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시인의 묘지가 수백 기의 이국인 묘와 함께 공동묘지에 있는 것이 가슴아팠다. 하지만 윤동주는 사후에 영광을 누리고 있고, 그 영광은 한국시문학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비록 꽃다운 나이 스물여덟 살에 작고했지만 윤동주는 시로써 아름다운 꽃을 피웠고 실한 열매를 맺었다. 우리 현대문학사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씌어진 수많은 시 가운데 국민 애송시 1위는 그 어떤 단체와 기관의 조사로도 윤동주의 [序詩]가 아닌 다른 시가 선정된 적이 없었다.
시인이 4년 동안 수학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의 교정에는 시비가 서 있다. 작고 50년 뒤인 1995년 2월 16일에 이 시비 앞에서 윤동주 시인 50주기 추도식이 거행된 바 있다. 놀라운 것은 같은 날 일본 도시샤대학에서도 시비 제막식과 아울러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이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꽃다운 나이의 한국 유학생을 사지로 보낸 후쿠오카에서도 그날 윤동주 50주기를 맞아 위령제가 거행되었다. 그의 시 [序詩]는 몇 년 전부터 일본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양국의 청소년들이 다 즐겨 암송하는 유일한 시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윤동주의 죽음을 애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순정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 정음사에서 초간본이 나왔을 때는 30편의 시가 실려 있었지만 1968년의 증보판에는 시 66편, 동시 22편, 산문 5편이 실려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가 전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마광수의 {윤동주 연구}(정음사, 1983)는 학계의 성과로 크게 평가되고 있고, 이건청의 {윤동주 평전}(문학세계사, 1981)에는 시인의 생애가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소상히 알려면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읽어보아야 한다. 현재까지 윤동주에 관한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하여 300편이 넘게 나와 있다.
이 승 하
나는 1999년 7월 20일부터 24일까지 중국 여행을 했다. 그 여행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기행문을 써 계간 문예지 {시안}에 싣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윤동주의 출생지인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의 생가와 윤동주가 다닌 학교 중 하나인 길림성 용정시 용문가에 있는 용정중학교(윤동주가 다닐 때의 이름은 은진중학교)를 찾아보고서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썼다. 자금성과 이화원, 만리장성 등 북경 일대의 관광지와 백두산 정상도 밟아보아야 했기 때문에 무척 빡빡한 여행 일정이었다. 그래서 찾아가 보는 것이 무척 까다롭다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윤동주의 묘소는 찾아보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출생지와 학교와 묘소 세 군데는 반드시 답사하고 와서 써야 할 글을 두 군데만 보고 와서 썼기에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는데 다행히도 2003년 10월에 윤동주의 생가와 용정중학교를 다시 방문한 것은 물론 4년 전에 못 가 보았던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보았고,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용두레 우물터와 해란강, 일송정 및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까지 찾아보아 무척 뜻깊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비로소 시인 윤동주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행기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어떤 부분은 지난번 여행기를 인용할 것이고, 또 윤동주의 생애를 완벽하게 복원한 송우혜의 명저 {윤동주 평전} 개정판(세계사, 1998)도 적절히 참고할 것이다.
2003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의 중국 여행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연구하는 팀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한 나는 {토지}의 공간연구 자료수집이라는 일차적인 목표도 중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4년 전의 여행 시에 찾아보지 못했던 윤동주의 묘소를 볼 수 있다는 일정표를 보고 마음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여행 일정은 인천→장춘→연길→용정→권하→연길→하얼빈→인천이었고, 윤동주 관련 여행 일정은 10월 20일로 잡혀졌다.
1. 시인의 생애
묘소 방문기를 쓰기에 앞서 시인의 생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는 시인의 생애가 아주 치밀하게 연구되어 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는 왜 중국에서 태어났던 것일까. 만주는 척박한 함경도 땅과는 달리 농사짓기에 적합한, 아주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었다. 두만강변의 도시 회령과 종성 등지에 살던 네 가문의 대소가 141명이 1899년에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갔으니 대규모 이주였다. 만주 땅에서 농산물을 많이 수확해 좀 잘살아보자는 뜻이 가장 컸다.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그곳에 들어가 삶으로써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어보자,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을 인재를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키우자, 뭐 이런 뜻도 이주민의 마음속에는 담겨 있었다.
명동에는 기독교가 일찍 전해졌고, 교육과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네 가문이 들어간 다음해인 1900년에 한 발 늦게 18명의 식구를 이끌고 명동촌에 들어가 정착했다. 윤하현은 부유한 농부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의 교원이었다. 윤동주는 태어나자마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출생 3개월 전에 고종사촌 송몽규가 태어났는데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된다.
생가는 잘 보존되어 있다기보다는 낡은 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집 안쪽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비문의 표제는 '윤동주 생가 옛터'였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어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4년 룡정촌은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 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 정부와 룡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여기서는 유적지를 '관광점'으로, 문학연맹을 줄여 '문련'으로 쓰는 것 같았다. 연구소를 '연구중심'으로 쓰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표기법이었다. 안내원은 이 집이 윤동주의 생가와 흡사하게 생긴 집을 여기다 옮겨놓은 것이라 했으므로 시인의 체취가 배어 있는 생가는 아니었다. 윤동주는 이 집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31년 늦가을, 용정가 제2구 1동 36호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어린이잡지 {아이생활}과 {어린이}를 구독하면서 시인에의 꿈을 막연히 키워가던 윤동주에게 있어 이 집은 그야말로 '지상의 낙원'이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했다. 소학교 시절,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글'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3월 20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자 친구들과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마침 그 무렵 명동에 공산주의자들의 테러가 성행하여 늦가을에 용정으로 이사를 하고, 윤동주의 용정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윤동주는 1932년 4월, 미션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 12월 24일은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인 시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를 쓴 날이다. 1935년 4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에서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시도하는데 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으로 학년을 낮춰 입학한다. 숭실중학교 학회지에 시 [공상]이 게재되어 최초로 활자화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하자 윤동주는 용정으로 되돌아왔고,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여 1938년 2월에 졸업했다. 한편 1936년 4월,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던 송몽규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는다. 용정중학교 역사전시관 벽에 도표로 그려진 학교 연혁사를 보면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 중학부가 다 용정중학교의 전신(前身)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시인은 이 학교에 5년 반을 다닌 셈이다.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시비가 세워진 것은 1992년 9월 10일이었고, 서울해외한민족연구소와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덕분이었다.
윤동주는 1938년에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기숙사 3층 지붕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한 방을 쓰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1939년에는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지용을 찾아 뵙고 시에 관해 질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0년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이 해에 같이 입학한 경남 하동 출신 정병욱과 친해졌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원고를 잘 간직했다가 광복 후에 시집으로 출간하여 윤동주라는 시인이 있었음을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1941년,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12월 27일에 졸업하고는 졸업 후 한 달 반 고향집에 머무르는 동안 부친이 일본 유학을 권유하여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2년 4월 2일, 일본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서양사 전공)에 입학했다. 릿쿄대학에 재학중이던 1942년의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데, 이때 마음이 바뀌어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을 했다. 송몽규가 있는 교토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일 수 있는데, 윤동주의 전학은 죽음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만다.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14일에는 윤동주도 검거되었다. 윤동주는 일제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3월 31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수인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2. 시인의 죽음
시인이 죽은 것은 광복 6개월 전이었다. 교토에 와서 맞은 첫 여름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해 7월 14일 윤동주는 나흘 전에 잡혀간 송몽규의 뒤를 이어 특고경찰(特高警察)에 의해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었다. 특고경찰이란 특별고등경찰을 줄인 말로 사상 감시를 주임무로 하는 특별한 경찰 조직이었다. 송우혜는 윤동주의 검거 이유를 이렇게 추리하고 있다.
그 동안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이니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문화운동'이니 하는 문제들을 놓고 의견을 나누면서, 자신은 앞으로 연극 분야에 투신해서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던 것이다.
일경의 취조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러자 취조관은 일련의 서류를 내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거의 1년 가까이 미행하고 엿들어서 작성해놓은 기록이었다. 어느 달 어느 날은 몇 시에 하숙방 불이 꺼지고, 어느 날 어느 식당에서 송몽규와 윤동주와 고희욱 세 사람이 만나서 함께 회식을 했다든가, 어느 날은 몇 시까지 송몽규의 방에서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그와 나누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소상히 적힌 것이었다.
윤동주는 이처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체포, 구금되었다. 교토경찰서 유치장에서 검사국 감옥의 독방으로 이감되었고,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은 후에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았다. 큐슈(九州)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도 그는 독방에 갇혔다. 매끼의 식사는 깡보리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 몇 쪽과 묽은 된장국 한 그릇이 전부였다. 윤동주의 때 이른 죽음은 추위와 허기가 초래한 병 때문이 아니라 생체실험용 주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옥사 통지를 받고 윤동주의 부친과 함께 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가져왔던 당숙 윤영춘의 증언([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나라사랑} 23집, 외솔회)이 있다.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꿈 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는 흐려졌다.
윤동주와 같은 시기에 같은 감옥에서 옥살이를 한 독립유공자 김헌술 씨도 5∼10㏄의 주사를 일주일 이상 맞으며 암산 능력을 테스트 받았다는 생체실험. 일제의 모르모트가 된 시인은 자신의 수인번호를 "모기소리 같은 가냘픈 소리"로 복창해 김헌술 씨는 시인의 수인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이국의 추운 독방에서 외마디소리를 높게 지르고는 운명하였다. 27년 2개월의 짧고도 짧은 생애였다.
3. 윤동주의 묘소
비록 냉전체제였다는 핑계를 댈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1985년 이전까지 윤동주의 묘소가 중국 땅에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윤동주의 묘소는 한-중 국교가 맺어지기 전에는 중국 방문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터라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오오무라 마수오(大村益夫) 교수가 용정에 있는 묘소와 비석의 존재를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하면서 비로소 알려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비문을 쓴 이는 1910년대 윤동주의 부친이 북경 유학을 갔을 때 같이 떠났던 5인의 유학생 중 하나로, 북경에서 돌아온 후에는 윤동주의 부친과 함께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 김석관 선생이었다. 한자로 쓴 비문이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번역되어 있다. 다음은 그 일부.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 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 만했는데, 춘풍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묘소를 새롭게 단장한 것은 현봉학 박사였다. 1988년 6월에 새로이 봉분이 단장되었고, '龍井中學校修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석이 비석 앞에 놓여졌다. 바로 그해 윤동주장학회도 설립되었다.
우리 일행은 소형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기사에게 용정의 동산(東山)에 위치한 중앙교회 묘지 터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를 꼭 가보고 싶다고 간청했다. 기사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면서 산 초입에서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조선족 남자를 한 분을 태웠다. 기사는 여행사 소속인데 윤동주의 묘소를 모른다니, 중국에 관광 오는 한국인 가운데 윤동주의 묘소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일까. 버스는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30분은 족히 달렸다. 그런데 그 조선족 아저씨는 윤동주의 묘소가 어디인지 찾아내지를 못했다. 그는 엉뚱하게 중국인 묘지로 일행을 안내해 우리는 드넓은 공동묘지를 미로를 헤매듯 한참 동안 찾아다녀야만 했다. 한국인의 묘지는 둥그스름하고 잔디가 덮여 있었지만 중국인 묘지는 묘하게도 둥글지도 않고 잔디도 없었다. 우리는 한참을 헤매다 '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을 발견하였다. 일행 중 누군가가 "술을 가지고 올 걸" 하고 말했지만 죽는 날까지 학생이었던 윤동주의 묘에 술을 뿌릴 필요는 없었을 같았다. 우리는 모두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시인의 묘지가 수백 기의 이국인 묘와 함께 공동묘지에 있는 것이 가슴아팠다. 하지만 윤동주는 사후에 영광을 누리고 있고, 그 영광은 한국시문학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비록 꽃다운 나이 스물여덟 살에 작고했지만 윤동주는 시로써 아름다운 꽃을 피웠고 실한 열매를 맺었다. 우리 현대문학사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씌어진 수많은 시 가운데 국민 애송시 1위는 그 어떤 단체와 기관의 조사로도 윤동주의 [序詩]가 아닌 다른 시가 선정된 적이 없었다.
시인이 4년 동안 수학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의 교정에는 시비가 서 있다. 작고 50년 뒤인 1995년 2월 16일에 이 시비 앞에서 윤동주 시인 50주기 추도식이 거행된 바 있다. 놀라운 것은 같은 날 일본 도시샤대학에서도 시비 제막식과 아울러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이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꽃다운 나이의 한국 유학생을 사지로 보낸 후쿠오카에서도 그날 윤동주 50주기를 맞아 위령제가 거행되었다. 그의 시 [序詩]는 몇 년 전부터 일본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양국의 청소년들이 다 즐겨 암송하는 유일한 시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윤동주의 죽음을 애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순정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 정음사에서 초간본이 나왔을 때는 30편의 시가 실려 있었지만 1968년의 증보판에는 시 66편, 동시 22편, 산문 5편이 실려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가 전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마광수의 {윤동주 연구}(정음사, 1983)는 학계의 성과로 크게 평가되고 있고, 이건청의 {윤동주 평전}(문학세계사, 1981)에는 시인의 생애가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소상히 알려면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읽어보아야 한다. 현재까지 윤동주에 관한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하여 300편이 넘게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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