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흐름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밀밭 풍경
이맘 때 즈음이 되면, 휴가계획으로 마음이 들뜨기도 하지만, 맑고 푸르른 하늘에 따가운 햇살과 열기를 머금고 영글어가는 황금빛 들녘이 눈에 더 선합니다. 그 풍성함을 직접 보려면, 도시근교 야외에라도 나가야겠지만, 오늘 우선은 그 그리움을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1853~1890)의 밀밭 풍경으로 달래보려고 합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완성도 높은 그만의 특징을 보여주며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200 여점의 그림을 그렸던 1989년과 그가 사망한 1890년 사이에 그린 밀밭 풍경그림 3점을 준비했습니다. 세 점 모두에서 고흐 특유의 강렬함과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으나, 각 그림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정취, 그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실감나는 감상을 위해 반드시 본래의 큰 그림으로 비교하며 감상하시고, 더 맘에 드는 그림은 바탕화면으로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고흐만큼 우리에게 널리 잘 알려진 화가는 없을 것입니다. 알려진 그의 작품 수도 많거니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며,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화가입니다. 렘브란트(Rembrandt)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현대 예술의 표현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 화가입니다.
단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제작된 1000여 점이나 되는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깔과 거친 화풍, 그리고 살아 생동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그를 자살에까지 몰고 간 정신질환의 고통과 불운한 그의 삶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월과 함께 잊히지 않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표작으로는 다수의 "자화상"과 우리에게도 친숙한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대부분의 그림들은 특히 그의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에 제작한 작품들로써,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감상할 밀밭과 관련한 세 작품도 이 시기에 완성한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살아 생전에 팔린 작품은 데생 1점 뿐이었을 만큼,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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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의 자화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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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이었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한 작은 마을(포르트 준데르트)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성직자였던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시절을 행복하게 보냈으며, 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랑이나 화상 점원, 목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날마다 예술작품을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고, 렘브란트와 당시 작품활동을 하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적잖은 밀레의 그림을 습작하였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 고흐의 활동 시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73~85년의 첫 번째 시기인 1880년대 전반기에는 잇따른 실패와 진로의 전환이 있었던 수습기였습니다. 미술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까다로운 기질과 씨름하면서 진정한 자기표현의 수단을 찾으려 애쓴 시기였으며, 이 때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후반기인 1886~90년의 2번째 시기에는 그림에 몰두하면서 빠른 성장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었던 시기였지만, 1889년부터 정신적인 위기가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습니다. 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 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 풍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색상도 다채로워졌고, 시각도 전통적인 시각에서 더욱 많이 벗어났으며 색조도 많이 밝아졌습니다. 1888년 초 파리 교외를 그린 몇 점의 풍경화와 "탕기 영감의 초상(Portrait of Père Tanguy)" "이젤 앞에 선 자화상 (Self-Portrait in Front of an Easel)" "해바라기" 같은 걸작에서 반 고흐의 후기인상파 양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으며,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자연의 어떤 효과나 분위기를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그렸습니다.
후반기에는 고갱과도 그의 작업실에서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되고 성격도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지기도 하였습니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 날에 신경과민으로 발작(또는 다툼으로 인해 고갱이)을 일으켜 그의 왼쪽 귀 일부를 잘랐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생애동안 정신적, 물질적 지주였으며, 결혼하여 아들을 한 명을 두었던 동생 테오에게 생계를 의존한 데서 오는 죄의식과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으로 이 시기는 결국 끝이 나고 맙니다. 고독을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 테오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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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나무가 있는 밀밭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Oil on canvas, 51.5 x 65 cm, Private coll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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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는 것처럼, 그림 전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타오르는 듯, 바람에 춤추는 듯, 무성하게 요동치는 들풀과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는 측백나무(삼나무), 바람에 흘러가는 먼 구름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가까운 구름, 그리고 흘러가면서 함께 하나가 되거나 흩어지기도 하는 대기의 하늘이 지금도 살아서 약동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밝고 고운 빛으로 서로 어우러진 색채와 억제된 색조를 사용함으로써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도 보여주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를르에서 생 레미로 옮겨간 고흐는 그곳에서 아를르 시대와는 또 다른 조화와 성숙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해를 쫓아다니는 해바라기에 공감의식을 가졌던 그가 생 레미에서는 힘찬 생명력으로 하늘이라도 뚫을 듯, 용솟음쳐 오르는 측백나무를 주제로 하여 풍경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이 외의 그림에서도 심심치 않게 삼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그림을 얼핏 보면, 그가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일면일 뿐, 이 작품이 갖고 있는 구성적 안정감과, 사물을 묘사하는 섬세함, 전체적인 조화, 그리고 통일된 채색법으로 또 다른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흐 자신도 이 삼나무가 있는 밀밭 작품을 '내가 그린 가장 명석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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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찌뿌린 하늘아래 까마귀 나는 밀밭 (Wheat Field Under Threatening Skies), 1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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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을 위하여 뜰에서 제작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언덕을 향하여 멀리 펼쳐져 가는 보리밭의 그림에 지금 열중하고 있습니다." 고흐의 편지 중에 있는 글입니다. 그는 또한 "저는 완전히 이 보리밭의 대작에 소모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최후 3점의 대작 가운데 하나로, 먹구름 낀 날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밀밭 풍경입니다. 위 그림과 같은 밀밭 풍경이지만, 그 느낌은 완전히 다릅니다. 아침과 저녁 풍경의 햇빛의 흐름과 그에 따른 느낌이 다르듯, 맑은 날과 당장 비라도 올 것처럼 먹구름 내려앉은 날의 밀밭 정경이 대조적입니다. 붓의 터치도 위의 두 그림은 부드러운 곡선인데 비하여 아래의 구름 낀 밀밭의 채색은 굵고 직선이며 더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배경의 구름 역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이 아니라 물이라도 쏟을 듯 낮고 넓게 굳어진 모양입니다. 그 아래 까마귀까지도 무리지어 힘차게 나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무겁고 음산하게 만들며, 비장한 마음까지 들게 합니다. 이 그림을 통하여 그의 마음과 생각을 예고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아래의 그림을 완성하고 난 불과 며칠 뒤였습니다. 또한 위의 그림은 색채 면에서 아래의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만큼 불길해 보이지는 않지만, 화면의 위 쪽 반 이상을 하늘로 배치함으로써 무서운 공백감과 불길 이상의 종언을 예고한 것 같은 작품입니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보리밭 언덕에 올라 자기 가슴을 권총으로 쏘았습니다. 탄환은 심장을 뚫었고 고흐는 상처를 손으로 누른 채, 걸어서 돌아와 조그만 지붕 밑 그의 방에 누웠습니다. 고통을 참으면서 파이프를 물고, 이틀 뒤인 7월 29일, 내일 모레의 아침에 동생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언과도 같았던 위의 그림이 비슷한 느낌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그림보다도 더 가슴에 싸하게 파고드는 이유입니다. 황금빛의 넓고 시원 밀밭 풍경을 보면서도 가슴 한 켠이 쓸쓸해져 오는 이유일 것입니다. 생동하는 그의 그림이 아직까지도 살아서 당시 고흐의 고민과 마음의 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 소리 없이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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