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의 14대 왕 선조,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나란히 있는 목릉 가는 길. 숲의 깊은 안쪽에 위치해 이 세상 공간이 아닌 것처럼 고요하다.
최근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문화재청의 전문 해설사가 왕릉의 구조와 가치에 관해 들려주는 해설 프로그램이 인기다. 왕릉이 자리한 각 구, 시별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사람들의 반응도 이전과 비교해 훨씬 뜨겁다. 이에, <럭셔리>도 한 분을 모셨다.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상지영서대학의 이창환 교수. 학계에서는 그를 ‘왕릉 박사’라고 부른다. 20년 넘게 조선왕릉 40기 전체의 크기와 높이, 조경과 석조물을 분석하고 측량하며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석한 모든 데이터를 일일이 한 장 한 장의 도면에 압축했는데 그 기록은 이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보통 문화재 하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는 6~7년의 긴 세월이 소요되는데 그의 사전 준비 덕분에 문화재청은 조선 왕릉을 약 3년 만에 안건으로 상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왕릉을 “당대 최고의 사상가, 철학가, 문장가, 조각가, 조경가가 합심해 지은 신의 정원”이라 정의한다.
2 조선 최초로 장자 승통을 이어받은 문종이 묻힌 현릉. 두 개의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자리한다.
10평의 봉분, 100만 평의 숲
많은 분들이 조선 왕릉을 왜 신의 정원이라 하는지 궁금할 테다. 세계문화유산에 조선 왕릉을 포함하는 작업을 준비하면서 우리 측에서 뽑은 키워드가 바로 ‘신의 정원’이었다. 상공에서 찍은 왕릉 사진을 보면 단박에 감이 온다. 봉분의 공간은 약 10평(33m2) 정도에 불과한데 그 주변을 수백만 평의 잔디와 숲이 둘러싸고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각종 건축물과 조각상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지도 않다. 그저 거대하고 울창한 숲과 정원이 봉분을 구름처럼 감싸고 있으니 그야말로 신神이나 가질 수 있을 법한 정원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 정연하고 신성한 분위기에 세계문화유산 위원회 사람들은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무덤은 그들의 눈과 마음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과 정원으로 치환됐다. 왕릉 주변의 잔디도 그들을 사로잡았다. 오랜 정원 문화를 간직한 덕분에 빛깔 좋은 잔디에 열광하는 유럽 사람들은 고운 잔디가 봉분과 그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에 ‘껌뻑’ 죽었다. 잔디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되면 남양주에 있는 홍릉 혹은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에 한번 가보라. 잔디의 미학이 어떤 것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초록의 여린 잎이 봉분을 부드럽게 덮고 있는 모습은 물결치는 봉분의 선과 어우러지며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3 숙종과 인현왕후 능의 무인석. 능제를 간소화하라는 숙종의 명에 따라 다른 곳과 비교해 크기가 매우 작다.
1 명종의 능. 인종이 후사 없이 승하해 왕위에 오른 그 역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사진에서 보듯 모든 왕릉은 비 내리고 눈 내릴 때 가장 아름답다.
2 단종 왕비 정순왕후의 사릉 입구. 안개 자욱한 길은 신로神路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처럼 ‘정원’이 강조된 능은 다른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중국, 베트남, 인도, 이집트 등의 나라에서는 모두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 자체에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와 타지마할이 대표적이다. 반면, 한국의 경우 왕릉 주변에 다른 건축물이 없을뿐더러 왕릉의 지름도 대략 11~15m에 불과하다. 이처럼 능의 형태가 다른 것은 철학의 차이 때문이다. 타국의 경우 왕이 죽어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원한 통치의 개념의 큰 반면 우리나라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통치를 하고 죽어서는 속세에서의 고단함을 잊고 편히 쉬는, ‘거쳐감’의 개념이 강했다. 외국의 경우 무덤을 통치자 스스로가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타지마할처럼 제 손으로 ‘찬란한 무덤’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었다. 우리는 달랐다. 능역의 조성은 국장이 끝난 후 왕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본인이 직접 주관하지 않았을 뿐 정성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능침에서 보이는 사가의 무덤과 민가를 이동시키고, 능역 주변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도 함부로 벨 수 없었다.
왕릉의 매력은 직접 발걸음을 해야만 실감할 수 있다. 서울 삼성동에 있는 선릉과 정릉도 좋지만 꼭 한번 가볼 만한 곳으로 광릉을 추천한다. 능침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특히 아름다운 곳으로 일제강점기 전국의 수많은 나무가 군수물자로 베어졌지만 일본군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해 상처를 입지 않았다. 숲 일대 면적은 약 3만8000헥타르. 전나무, 소나무 빼곡한 숲길만 약 400m에 이른다. 다른 왕릉과 비교해 무척 간소하게 지어 여백의 미학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조선의 7대 임금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지를 받들어 왕실은 풍수가 좋은 양지바른 곳에 능을 만들고 그 일대에는 빼곡히 나무를 심었는데 그 숲이 바로 광릉수목원이다. 조선 왕릉에는 신神자가 붙은 명칭이 많기도 했다. 정자각丁字閣(제전祭殿, 왕릉王陵, 원園 등의 바로 앞에 짓는 ‘丁’자형 침전寢殿)의 뒷문을 신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여 신문神門, 정자각 앞과 뒤쪽으로 이어진 길을 신로神路, 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다리를 신교神橋라고 불렀고 돌아가신 혼백이 의지할 자리는 신위神位 라고 했다.
3 제18대 왕 현종이 묻힌 숭릉. 숲이 봉분을 겹겹이 싸고 있는 풍경은 조선 왕릉을 왜 신의 정원이라 하는지 말해준다.
4 태조 이성계의 기일인 양력 6월 27일에는 해마다 건원릉에서 기신제가 열린다.
왕릉 조영 팀은 최고의 테스크포스 팀이었다
왕실 조영은 왕실로부터 총애를 받는 당대 최고의 인사가 진두지휘했다. 태조의 건원릉과 제릉(태조의 정비正妃 신의왕후의 무덤)의 조영造營을 책임진 박자청이 대표적으로, 그는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건설교통부 장관이었다. 왕릉 조영의 책임자들은 조선 팔도에서 가장 뛰어난 풍수가, 철학가, 조각가를 찾아 투입했다. 조선 후기 최고의 문신 중 한 명인 송시열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사실, 조선 왕릉은 처음부터 ‘작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인사가 신심을 다해 열심히 일할 만한 계기가 충분했다는 얘기다. 왕의 능을 조성하는 팀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비교할 수 있을 테스크포스 팀으로, 이 안에서 인정을 받아야 향후 왕권이 바뀌었을 때 그만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두뇌가 모여 완성한 능은 미학적으로도 훌륭할뿐더러 보면 볼수록 지혜롭다. 대표적인 것이 수목의 배치다. 흔히 숲 주변으로 소나무만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수목의 식재에도 규칙이 있었다. 능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예상하듯 소나무를 심었다. 주나라, 한나라 때부터 이어온 동양의 예법이기도 하거니와 고매한 기품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럼 소나무 뒤쪽으로는 어떤 나무를 심었을까? 떡갈나무다. 혹시 발생할 화재에 대비해 껍질이 두꺼운 나무를 바깥쪽으로 두른 것이다. 상수리나무도 많이 심었는데 이는 기근에 대비한 것이다. 봉분 주변으로 때죽나무도 많이 심었는데 그 이유가 또한 기막히다. 5월경이면 때죽나무에는 새끼손톱만 한 흰색 꽃이 줄기마다 주렁주렁 핀다. 녹음 가득한 왕릉 사이사이에 올망졸망한 흰 꽃이 한 무리씩 피어나는 풍경을 상상해보라. 천국이 따로 없다. 나무의 이름을 왜 때죽나무라고 했는지 아는가? 꽃이 지면 때죽나무에는 열매가 열리는데 이 열매를 양파 망에 한가득 넣고 개울가 돌 틈에 넣으면 물고기가 그 향에 취해 떼로 죽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기록에 따르면, 옛날 민가에서는 이 열매를 마취약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5 조선 왕릉 능제를 적용해 조성한 마지막 왕릉, 예릉.
조선 왕릉은 조영 철학에서도 빛난다. 왕릉을 방문하면 홍살문(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등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과 가장 먼저 마주하는데 이곳에서는 능이 보이지 않는다. 앞쪽의 정자각만 보인다. 죽은 왕이 노니는 공간을 신성시한 배치가 왕릉을 둘러싼 분위기를 더욱 신령스럽고 신비롭게 한다. 장명등長明燈이 신의 공간(무덤 뒤쪽)이 아닌 현세의 공간(무덤 앞쪽)에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것은 물론 밝은 기운을 오랫동안 받으라는 뜻이 있는 장명등을 망자가 아닌 후손의 쪽에 둔 것이다. 이는 후손의 앞날에 길이길이 빛이 함께하기를 바란 것으로 자신들의 안위와 영화만을 생각했던 다른 나라의 능과 가장 차별되는 부분이다.
1 삼성동의 정릉. 뒤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2 호랑이 석물의 표정을 유심히 보라. 무섭기는커녕 얼굴 한가득 웃음과 장난기를 품고 있는 듯 해학적이다.
조선 왕릉은 우리나라 최고의 럭셔리다
조선 왕릉에 가면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다. 화강암으로 지어 투박하고 단단한 느낌이 나는 석물은 왕의 수호신처럼 든든하다. 모두 14세기~20세기 초까지 519년에 걸쳐 만든 것으로 중국과 베트남을 포함해 어느 유럽에서도 이토록 크고 육중한 석물은 흔치 않다. 그 미려함은 또 어떤가? 화강암은 대리석과 달라 모양을 만들고 무늬를 내기가 무척 어렵다. 큰 정을 사용해 일일이 치고 깎아 모양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물의 옷차림이나 얼굴을 보라. 앙다문 입술, 치켜뜬 눈, 강건하게 서 있는 모습 등 디테일이 무척 뛰어나다. 흔히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최고로 치는데 그보다도 탁월하다. 시기도 우리가 훨씬 빨랐다. 그런 의미에서 왕릉 40기에 있는 약 1600여 개의 석물은 또 하나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에 가면 문인석과 무인석이 나란히 있는데 대개 문인석이 능침과 더 가까이에 있다. 조선 시대에는 문인의 권력이 무인보다 높았기 때문인데 이 같은 경계는 영조 때 허물어진다. 두 개의 권력을 동등하게 맞춘 것이다. 반면 고려에서는 종종 무인석이 문인석보다 능침에 가까웠다.
석물과 함께 눈여겨볼 것은 봉분 주변에 있는 호랑이 석물이다. 흔히 무서운 얼굴일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 해학적이다. 이는 우리 조상이 죽음을 슬프고 두려운 것이 아닌 편안하고 복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해악의 미덕은 혼유석魂遊石(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에서도 발견된다. 2000여 명의 장인을 동원해 만든 직사각형의 석판을 북 모양의 돌이 받치고 있는데 마치 “선왕이시여, 북치고 노소서”라고 말하는 듯하다. 왕릉 조성에 관한 세부 사항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조선시대 오례의 예법과 절차에 관하여 기록한 책으로 세종 때 시작되어 1474년 신숙주 등이 완성했다)에 따라 결정했는데 실제 왕릉 조성의 예법과 절차는 흉례凶禮가 아닌 길례吉禮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최고의 철학과 예술이 집약된 조선 왕릉은 능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어 더욱 가치가 높다. 숙종과 인현왕후가 나란히 묻히고 먼 발치에 장희빈 묘가 있는 고양 서오릉西五陵, 할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사도세자)를 위해 정조가 무척 공을 들여 완성한 화성의 융릉隆陵, 태종과 원경왕후의 봉릉을 같은 언덕에 만든 쌍릉인 서초구의 헌릉獻陵 등 저마다 억만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이야기를 품고 있다.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제33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 회의는 지난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렸다. UN 산하 208개 회원국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이는데 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20개 상임이사국 대표가 결정한다. 보통 20분간 영상물을 틀고 15분간 토론을 펼치는데 조선 왕릉은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초스피드로 등재가 결정되었다. 자연친화적인 독특한 장묘관, 석물 등에 감긴 예술적 독창성, 아직껏 국가 제례가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본 회의 전, 이창환 교수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대표로 실사를 나온 중국인 인사를 모시고 삼성동에 있는 선릉과 정릉에 갔었다. 능의 뒤편으로 조성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그를 데리고 가 “자, 여기서 능과 능을 건너 앞쪽으로 펼쳐지는 서울의 도심을 보십시오. 망자亡者의 영혼이 현세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느낌이 신비스럽기도 하고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잠시 감상의 시간을 가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끝없는 재개발의 압력 속에서도 도심 한가운데 이토록 온전하고 아름다운 녹지와 능을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다. 과연, 신의 정원이라 할 만하다.”
3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선릉의 길. 왼쪽의 높고 넓은 길이 선왕의 길, 오른쪽의 좁고 낮은 길이 살아 있는 왕의 길이다.
한눈에 보는 조선왕릉 분포도!
1 장릉(파주) 16대 임금 인조와 그의 원비 인열왕후의 합장릉이다. 병풍석에 기존의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해 모란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2 삼릉(파주)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나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이 간략히 조영된 장순왕후의 공릉과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단릉이 함께 있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자매 지간이다. 함께 있는 영릉은 영조의 큰 아들 진종과 비 효순왕후의 능이다.
3 서삼릉(고양시)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이 함께 있다.
4 온릉(양주시, 비공개) 폐비의 신분으로 승하한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의 능. 능을 조영할 당시에는 왕릉의 상설을 갖추지 못했다가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되어 시호를 단경이라 하고 능호를 온릉으로 추복追服했다.
5 장릉(김포)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의 비인 인헌왕후의 능. 쌍릉으로 조영되었다.
6 서오릉(고양시) 5기의 능이 몰려 있는 곳으로 숙종과 인현왕후가 한 울타리 안에 묻혔고 인원왕후 능이 바로 뒤편에 자리한다. 장희빈의 대빈묘도 1969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 능도 함께 있다.
7 광릉(남양주시) 세조와 정희왕후가 묻힌 능으로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없애고 석실을 회격으로 바꾸는 등 검소하게 조영했다. 이러한 상설 제도(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두른 간략한 조영)는 이후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어 이후의 왕릉 조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8 태강릉(노원구) 태릉에는 11대 임금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강릉에는 13대 임금인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 심씨가 묻혔다.
9 동구릉(구리시) 태조 건원릉, 현릉(문종), 목릉(선조), 휘릉(인조비), 숭릉(현종), 혜릉(경종비), 원릉(영조), 수릉(추종왕 익종), 경릉(헌종)의 9개 능과 명빈 묘가 있다.
10 동구릉(구리시) 태조 건원릉, 현릉(문종), 목릉(선조), 휘릉(인조비), 숭릉(현종), 혜릉(경종비), 원릉(영조), 수릉(추종왕 익종), 경릉(헌종)의 9개 능과 명빈 묘가 있다.
장릉(영월)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의 능. 능침에서 바라보는 첩첩의 전경이 아름답고 장엄하기로 유명하다. 능역 안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배향하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11 홍유릉(남양주시) 홍릉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종과 명성황후가, 유릉에는 순종과 두 왕후가 묻혔다.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으로서 가치있다.
12 정릉(성북구)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태조가 승하한 후 원비의 소생인 태종에 의해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능 또한 현재의 위치로 천장遷葬되었다.
13 의릉(성북구) 20대 왕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다.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陵 형태로 풍수를 고려해 결정한 것이다.
14 융건릉(화성시) 융릉은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묻힌 곳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이곳에 연꽃을 새긴 병풍석을 설치하는 등 왕릉처럼 조영했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무덤이다. 15 선정릉(강남구) 선릉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왼쪽 언덕에는 성종 의 계비 정현왕후가,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이 묻혔다. 정릉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능으로 조선 왕릉 중 몇 안 되는 단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16 헌인릉(서초구) 헌릉에는 3대 임금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분이, 인릉에는 23대 임금 순조와 비 순원왕후가 묻혔다. 문・무인석의 매우 사실적이고도 생기 있는 이목구비와 표정으로 유명하다.
17 영릉(여주군) 조선 4대 임금 세종과 정비 소헌왕후의 능으로 조선 시대에서는 최초로 보이는 합장릉 형태다.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했다. 조선 17대 임금 효종과 정비 인선왕후의 능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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