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이기 때문에 3장이다, 3은 이미 체질화 되어있다.
김문억
3장 6구가 못 되면 시조가 아니다
요즈음 새삼스럽게 양장시조 라고 하는 글이 시조전문지에 올라오고 있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자유시에서 발표되고 있는 짧은 시와는 또 다른 이야기다.
그런 식이라면 종장 한 줄만 써 놓고 단장시조라고 할지도 모른다.
시조의 3 장 구조라는 위대성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그냥 짧은 시를 쓰고 싶으면 쓸 일이지 구태여 시조라는 명칭을 차용 할 필요가 있겠는가. 3장 6구가 안 되면 시조라고 할 수 없다.
위 글은 필자가 시조작가에게 던진 질문서에 들어있는 일부를 발췌한 글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 무심코 책<정형시학.2012. 하반기호>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양장시조는 물론이요 시조작가들이 마침내 단장시조라고 하여 시조의 형식 중 종장만 흉내를 내 놓고 단장시조라고 하는 참으로 해괴한 명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양장시조라고 칭한 글을 읽으면서 걱정했던 일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현대문학의 변천사에 영합되는 까닭을 여러 이유로 달고 있지만 어떤 치장으로라도 시조라고 하는 이름만큼은 동의 할 수가 없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시조 형식을 너무 단순한 모양으로만 보았거나 시조문학의 원형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역사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얘기해서
시조 형식 중에서 2장 또는 1장 길이의 글이 나왔다면 이는 그냥 자유시일 뿐 시조라고 하는 명칭을 붙일 수 없다.
시조와 자유시의 경계는 3장 6구 12어절 이라고 하는 확고한 틀이 유지될 때만이 가능하다. 그런 경계가 허물어졌다면 시조라고 하는 까닭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양장시조와 단장시조라고 이름 지어 놓은 글은 분명하게 자유시라고 하는 상대적 이유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시조문학 형식구조를 이야기 할 때는 논의의 대상을 자유시로 택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같은 시 이면서도 시조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 온 까닭은 처음부터 자유시와는 사뭇 다른 확고한 형식구조를 근간으로 삼아온 탓이다.
왜냐하면 자유시 역시 시조문학이 늘 자랑거리처럼 주장하고 있는 음악적 가락이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양장이니 단장 같은 이름을 붙여 놓고 시조라고 한다면 시조문학 자체의 문제를 넘어 자유시 작가들을 비롯한 한국문학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며 시조의 존재감이 깡그리 사라지는 전초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장이나 단장 같은 길이와 율조의 형식을 갖춘 시는 자유시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자유시에서 발표되고 있는 짧은 시는 자유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자유로운 문학의 자유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을 뿐 자유를 거부하고 구속의 미학을 자청해서 선호한 시조문학이 관심 둘 문제가 아니다. 만약에 오늘의 시조문학이 그런 문학사조를 따라가야 할 필연에 부딪치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다면 차라리 시조문학 무용론이 훨씬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양장이니 단장이니 하고 축소를 해 놓는다면 너무 위험하다. 왜냐하면 또 말 하지만 하이쿠 같은 일본시까지 논의되는 위험찬만한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시조문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단수 쓰기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더욱 더 시급한 문제다. 그 동안 오래도록 지속 되어왔던 시조문학의 부진은 연작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수만 갖고도 자유시에서 제창되고 있는 짧은시와 버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온 자유시라고 해서 영어나 불어로 쓰지 않는다. 자유시 역시 얼마든지 4.4 음보라고 하는 우리말의 음악적 율 속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구태여 시조라고 하는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은 확고하고 분명한 틀의 모양을 갖고 그 틀이 내포하는 우리 민족의 내재적 혼을 향유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우리만의 장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조문학은 부끄러운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오래도록 민족시로서의 생명을 유지 해 올 수 있었다.
더구나 단시조의 한 편은 앞 장과 뒷장과의 조응관계를 잘 갖추면서 전체적인 한 편의 작품을 완성 해 나가는 창작상의 질서와 기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맛으로 구태여 자유를 거부하고 자청해서 시조라는 틀 속으로 들어가서 쓰고 읽는 재미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방에 일장검 짚고 서서
큰 파람 긴 한 소리에 거칠것이 없어라
초장이 기본율을 넘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길게 빼고 있지만 중장에 와서 초장 보다는 짧게 줄였기 때문에 초장의 긴 가락과 잘 조응하여 맛을 더 하고 종장에 와서는 확고하게 제 자리를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조문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황진이 시조를 보면 짧게 놓고 길게 빼고 앞 구가 짧으면 받쳐 주는 뒷구를 좀 더 길게 놓는 기법으로 무궁무진한 가락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함에 어찌 경천동지 할만한 기찬 발상이 떠 올랐기로서니 한 장 쯤의 글을 놓고 時調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고르고 자시고 할 글 줄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시조가 왜 3장 이어야 하는 까닭이 깡그리 무시당하고 있다.
한편
時調라는 이름은 전통음악 창에서 연유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인쇄문화의 발달로 읽는 시로 발전된 것이지만 지금도 신웅순 같은 시인은 시조문학이 창과 함께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터다. 시조 쓰기를 즐기는 작가라면 한 번쯤 숙고 해 볼만한 이유있는 주장이다. 물론 현대음악으로 작곡되는 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아무튼 창으로 옮겨 보거나 랩 악보로 옮겨 보거나 간에 그렇게 짧은 가사를 갖고 어찌 악보로 옮길 수 있겠는가. 청산~리이~~ 몇 소절 빼고 나면 그냥 끝날 일이다. 천지를 희롱하며 휘감치고 풀어 놓으면서 사람의 애간장을 환장하게 흔들어대는 시조창의 그윽한 매력은 연줄 끊어지듯이 툭! 그만 아니겠는가. 참말로 웃기는 일이다.
여기서 잠시 자유시 몇 편 읽고 가 보자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雜草)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皮膚)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悲哀)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광균의 <와사등(瓦斯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 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던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
-심훈의 그날이 오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문둥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락이 듬뿍 배어있는 자유시는 얼마든지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얼마나 부드럽고 넌출거리는 가락이 살아 있는가.
이런 자유시는 모두 시조의 한 장으로 놓아도 무리가 없는 율격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말 맛에서 유발하는 음율 같은 음악적 요소는 한국문학의 어느 장르에서나 자연스럽게 찾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조선의 가사문학이 대개가 다 그렇다.이는 말이 글이 된 우리말이 기본적으로 그런 음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묵은 얘기를 지금 내가 하고 있다. 시조문학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조는 분명한 틀을 갖춘 정형일 뿐이다. 지극히 상식적 이야기를 새삼 강조하자니 비극이다.
또한 그러한 말맛의 이유로 시조에서 강조하고 있는 가락이란 것은 시조쓰기를 거듭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體得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엉뚱하게도 시조만의 전유물처럼 강조하면서 어느 경우는 거의 신앙적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시조 풍을 벗어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고 내용적 현대시조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문제라면 그런 것이 문제다.
혹여, 시조작가가 쓴 글은 기본 율을 허물어도 다 시조라고 하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또한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짧은 시 라고 할 일이지 2줄 1줄짜리 글을 놓고 구태여 시조라고 할 까닭이 없다. 그것이 비록 실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의 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간편한 것을 따르고 sns 같은 문명의 유통기기를 이용하여 소통하는 시대가 왔지만 이런 시대의 변천에서도 시조문학은 제 자리를 잘 지키면서 내용적인 혁신으로 발전 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고시조가 현대시조로 넘어오는 이양 기 무렵 고시조 풍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조문학이 복고풍이나 낭만에 빠져 모더니즘이나 현실 같은 신문학을 빨리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너무 길게 내려오고 있다.
현대문학을 즐기는 독자들이 요구하는 내용을 갖춘 단수 시조가 나온다면 45자 내외의 길이가 길다고 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단수를 기본으로 해서 사설시조를 확대 발전 시켜야 하며 사설서사시조 사설대하시조 사설판소리로 확대시켜 나가야 한국문학의 대표라고 하는 자리를 갖출 수 있다. 더구나 하이쿠라고 하는 일본시가 자꾸만 떠올라서 이런 논의가 더욱 더 아찔하기만 하다.
시조이기 때문에 3장이다, 3은 이미 체질화 되어있다.
시조가 그 당시 왜 탄생될 수 있었고 시조는 왜 3장의 얼굴을 갖고 나오게 되었는지 시조 창작 입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민족 문화의 뿌리를 한번쯤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시조가 생성하게 된 세포 조직을 들여다보면 우리민족의 말 놀림과 함께 생활 관습부터 홀수문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모든 명절이나 절기 관혼상제의 택일 같은 생활 관습은 모두 홀수로 되어있다. 이미 뿌리 깊이 박혀있는 1.3.5.7.9 의 홀수 중에서도 3이라는 수는 생활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우리 생활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필자의 산문. 홀수문화 참조 바람)
우리 민족의 오래된 관습에서 오는 홀수 문화는 시조문학을 잉태 할 만큼 세포조직으로 응결 되었던 것이다. 매우 지당한 귀결이다. 기승전결의 근본에는 그런 까닭이 도사리고 있다.
3章 구조의 시조가 탄생하는 연유가 예사롭지 않았다. 詩想을 펼친 후엔 받아서 전개를 하고 말미를 종결하는 3단계의 의미가 그렇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조선이 개국되기까지의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세이레(21 일)동안 끈기를 이겨내고 사람으로 태어난다. 天 地 人의 홍익인간을 바탕으로 하여 고조선을 개국하는 뜻도 여기에 둔다.
우리말에서 자생된 민족 시 라고 하는 연유도 여기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주어와 서술어를 한 묶음 씩 엮어 가면 한 句가 되고 그렇게 반복되는 4:4 음보의 발걸음이 3章이라는 가락을 확보하면서 정형화된 큰 틀로 엮어 매어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모양새는 시조 탄생 이전부터 멀리는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려의 별곡 같은 가곡들이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3줄이 보기 좋고 편하거나 간단해서 정착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이유가 군말을 불허하고 분명 하면서도 간결한 양반문학으로 정착된 것이었다. 종장의 첫 구가 3이어야 한다는 불변 역시 초 중장과 조응할 수 있는 축의 디딤돌로서 단단하게 옹이 박은 확고한 형식이었다. 초 중장을 이끌고 내려온 리듬을 갈무리하면서 종장의 가락으로 반전 시키고자 하는 구름판으로서의 축에 대못을 친 것이다.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성리학이 틀을 잡은 조선의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의 산물이었다.
이런 사유를 무슨 근거로 하여 3장을 허문다는 말인가
이는 당시 20세기 초반에 벌어졌던 문학사상으로 카프 계열과 시비가 붙자 시조를 혁신 시키자는 뜻에서 혼란스럽던 시절에 잠시 양장시조라고 하는 것이 실험적으로 시도 되었을 뿐이다.
그 일면에는 그 분들이 일본 유학 파 라고 하는 신분으로 봐서 일본의 하이꾸를 맘속에 두고 실험 해 볼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구태여 축소지향의 왜 문화를 흉내 낼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명분이나 실재에 있어 양장시조는 명맥을 유지 할 수 없었다. 그러함에도 일부 敎師들이 시조의 구분에 있어 마치 양장시조라는 형식이 있는 것처럼 기술 해 왔던 것이다.
더구나 요즈음 새삼스럽게 양장시조 라고 하는 글이 시조전문지에 올라오고 있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마침내 단장시조 라고 하는 나의 걱정이 현실로 오고야 말았다.
시조문학은 민족문학이다. 시조의 3장 구조라는 위대성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그냥 짧은 시를 쓰고 싶으면 쓸 일이지 구태여 시조라는 명칭을 차용 할 필요가 있겠는가. 3장 6구가 안 되면 시조라고 할 수 없다.
시조가 탄생할 수 있었던 민족문화의 D.N.A를 살펴보면 시조가 3장 이어야 한다기보다는 시조이기 때문에 3장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 체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출처 :김문억의 시조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 김문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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