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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 예술 ◑

사설시조를 찾아서 2. 김문억

by sang-a 2012. 12. 31.

사설시조를 찾아서 2. /김문억

 

ㅁ. 사설시조의 형성시기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무래도 못잊을다

瓦治 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뛰놀듯이 두더지 아드님인지 꾹꾹 뒤지듯이 사공의 成伶인지 상앗대 짚으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음흉히도 야릇해라

前後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되  참맹세 간밤 그놈은 참아 못잊을까 하노라.

                                                    지은이 마상

 

蔓橫淸類 라고 했다. 청구영언에 나오는 말이다

사설시조를 처음 시조문집에 올리면서 만횡청류라고 했던 것은 어떤 연유일까

1728 년에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에서 사설시조는 말씨가 음란하고 뜻하는 바가 옹색해서 본받을 바는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전해오던 것으로 일시에 없애기 어려워 특별히 수록 한다고 했다

그러한 뜻이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사설시조를 짓고 있었다는 얘기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점잖은 양반네들로부터 시작된 시조를 묶는 책에 외설스러운 성에 대한 사설시조를 올리자니 무슨 구실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다.  그렇게라도 엮어 놓아야만 시조문집으로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으며 이미 백성들에게 저변확대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증거도 된다.

시조문학이 지향하는 풍류나 가락의 멋스러움도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면 자연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문화적 근원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우리 민족의 생활양식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다

그것이 처음 민중 속에서 태동 되었다 하더라도 문자가 생기고 인쇄되면서 기록된 글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어쩔 수 없이 지식층인 선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층 백성들은 설사 개인적으로 좋은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문집에 올릴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  당시의 환경을 짐작 해 볼 때 사설시조 역시 평시조가 형성되던 시기에 얼마든지 흥얼거릴 수 있었고 비양거릴 수 있었다

사회 구조란 것이 언제나 양면성을 갖고 형성된다고 보았을 때 양반 반대편에 평민이 존재했고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있을 수 있는 것이어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세력의 반대편에서도 삶에 대한 표출은 얼마든지 나타났던 것이다. 오히려 삶의 질박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서 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표현 내용이 외설스럽고 본받을만한 내용이 못된다 하여 문집에 오르지 못한 것 뿐. 평시조가 발생하여 각광을 받던 시기에 때 맞춰서 하층 계급에서도 사설시조는 발생했을 것이다. 기록에서 누락 되었을 뿐이다

 

 蔓橫淸類 라는 문자적 해석만 보더라도 점잔하지 못한 글의 유형이란 뜻이다

자고로 줄서기를 한다는 일은 통상적으로 從隊를 이루는데 담쟁이나 나팔꽃 아니면 넌출거리는 칡넝쿨이 얼크러설크러 지면서 옆으로 뻗어나간 무리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만고강산 드렁칡이다. 남녀간이 어울리면서 수작을 부린 경험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란 공통적 심성을 통해서 양반네를 비양거리고 싶었다.  歌 아니면 曲과 같은 詩문학에 적합한 용어도 흔하련만 구태여 무리라고 이름 붙여진 것만 봐도 그렇다. 내용이 남녀간의 성에 관한 노골화 된 묘사로 읽는 이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육감적으로 동화될 수 있게 썼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사설시조는 시조가 탄생하던 무렵부터, 아니면 그보다 오히려 더 먼저 사설시조가 써지고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평시조의 파격에서 사설시조가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설시조의 중장 길이가 줄어들어서 평시조의 단아한 모습으로 변모 했다는 견해다

사설시조의 형성시기를 놓고 논의가 분분할 수밖에 없는 것은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내용이 너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사설시조가 평시조와 비교하여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문장의 길이와 함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평시조가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네들로부터 시작 된 문학이라면 사설시조는 마치 평시조에 맞서기라도 하듯 평민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견해다. 뚜렷한 근거 문헌이 전해지고 있지 않은 입장이다 보니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감안한 추측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역대로 전해지고 있는 시가문학의 발전사를 폭 넓게 보더라도 악곡이나 경기체가 같은 기득권층의 점잔한 시가가 있었다면 오늘날의 유행가 같은 서민층의 별곡이나 민요 가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측면으로 볼 때 시조가 형성되던 무렵부터 사설시조역시 어느 부류에서 지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던 것이 조선 말기로 오면서부터 시조든 사설시조든 누구나 소리 내서 불러도 귀천을 가리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널리 보급을 본 시조문학을 두고 國風이라고 부를 만큼 저변확대가 되어 있었다. 

 

사설시조를 내용만으로 평가하여 서민층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으나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제기 해 본다. 위에서 인용된 작품

'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무래도 못잊을다'

를 보더라도 수절 못한 과부가 쓴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과연 그럴까. 사회적으로는 신분의 계급 차이가 존재하고 가부장제도 하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지엄했던 때다. 비록 수절 못한 과부가 그런 바람을 피웠다 치더라도 입 밖으로 내 놓고 떠벌릴 수가 없는 노릇이며 또한 당시의 조선 여인으로 이만한 글재주를 발휘할 만큼 학식 있는 여인네가 얼마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다 언감생심 글공부를 한다는 일은 여염 집 아낙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사설을 쓰고 전해 온 것일까

글이란 창작이다. 체험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쓸 수도 있지만 듣고 보고 느낀 것에 상상으로 더 보태어 지어낼 수도 있는 것이 글쓰기의 자유다. 언어의 자유와 해방은 특히 시에서 관용될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하겠다. 시를 표현대로만 감상하고 받아들인다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서민층에서 쓴 작품도 있겠지만 오히려 양반 행세를 했던 식자층에서 창작 되었다는 심증이 더 가고 있다. 기득권층에 오르지 못하고 밀려난 양반 아니면 기득권층에 있으면서 기방에 드나들던 한량들의 것일 수도 있다. 더구나 작품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단순히 성애를 썼다고 하지만 다방면의 학식이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노련함이 엿보이고 있다. 그 많은 사설시조가 작가미상으로 전해져 오는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남녀간의 성애란 빤한 것이어서 남자들이 얼마든지 여성 입장에서 글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분량의 작가미상 사설시조는 식자층에 있던 남성들의 작품으로 볼 수 있으면서 평시조와는 달리 향유 층이 따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전을 통해서 보는 조상들의 해학이나 풍자는 음흉스럽기 작이 없는 또 하나의 멋이었는지 모른다.

 

사설시조의 형성시기 역시 평시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조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어쩌면 활달한 내용의 자유분방함으로 봐서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가정이라면 김영수의 분석대로 사설시조가 먼저 형성된 후에 중장이 줄어들면서 단아하고 절제미가 있는 평시조로 변모 되었을 것이란 설도 설득력을 갖는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혼란기에 빠져있던 고려 말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이 개국되고 차츰 안정기로 접어 든 역사적 배경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ㅁ 사설시조의 형태

 

閣氏네 더위들 사시오, 일른 더위 느즌 더위 여러 회포 묵은 더위

五六月 伏 더위에 情의 님 만나이셔 달 밝은 平床우희 츤츤감계 누엇다가 무음 일 하엿던지 五腸이 煩熱하고 구슬땀 흘니면서 헐떡이넌 그 더위와 冬至달 긴긴 밤의 고은님 다리고 다스한 아름묵과 돗가운 니불속의 두 몸이 한몸 되야 그리져리 하니 手足이 답답하며 목궁이 타올적의 웃묵에 찬 숙융을 벌떡벌떡 켜난 더위를 閣氏네 사려거든 소견대로 하오시쇼

댱사야 네 더위 여럿 中의 님 만나는 두 더위야 뉘 아니 조아하리 남의게 팔지말고 내게 부듸 파로시쇼

 

사설시조의 가장 두드러진 모양은 중장의 길이가 평시조에 비해서 매우 길게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초장이나 종장의 길이마저 어느 정도는 융통성이 있다고 하겠다.

다만 3 장이라고 하는 형태상의 의미구조는 평시조가 갖는 시조의 본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어느 것이 먼저 써 졌는지는 모르지만 3 장의 구조 형식으로 인하여 시조라고 하는 정형으로 글 모양을 갖추었다는 것에 공통점을 갖는다. 이름 그대로 지은이의 私說에 의한 辭說 가락이 보다 더 선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 평시조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초장이나 종장이 평시조와 같은 길이로 표현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다 초, 종장의 길이마저 가감의 융통을 부리고 있다는 것 또한 사설시조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우리의 시조가락은 글자 수에서 나오기 보다는 언어의 장단으로 이루어진 음의 보폭으로 상호간에 조응 하면서 한 묶음의 글句가 이루어지고 그런 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가락을 이루기 때문이다. 전체 구성으로 봐서 어느 한 장의 길이가 평시조의 그것 보다 한 구 이상 길어지면서 3 장의 구분이 확실하다면 길던 짧던 정형이라는 개념을 붙여 사설시조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설시조를 정형으로 보는 견해도 그런 인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용된 작품 초장과 종장을 보면 평시조 보다 훨씬 길게 이어져 있다 

중장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로는 시 한편이 갖는 형태 구조상 起承轉結 이라는 구성에 충실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초장이 起에 해당한다면 承轉으로 이어서 엮어지는 표현의 절정에 이르고 보면 하고 싶은 말의 전개 상 중장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사설시조는 단시조와 비교하여 3 장이 갖는 형태구조는 갖지만 표현의 방법으로 각 장마다 약속된 길이는 없는 셈이다. 시를 쓰다가 보면 용출하는 흥에 겨워 신명이 춤을 추는데 어찌 멈출 수가 있겠는가 

 

 바람도 쉬여 넘난 고개, 구름이라도 쉬여 넘난 고개,

山眞(산진)이 水眞(수진)이 海東靑(해동청), 보라매도 쉬여 넘난 高峯(고봉) 長城嶺(장성령) 고개,

그 너머 님이 왔다 하면 나는 아니 한 번도 쉬여 넘어가리라.

 

평시조에 비해서 각 장마다 길이가 자유롭다고 하지만 의미 없이 그냥 흥에 겨워서 늘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길이가 길어졌다 하더라도 그 짜임새는 시조 본래의 탄탄한 가락을 유지하면서 각 장마다 확연하게 갖추어야 할 내용적인 구분과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종장 도입부분은 평시조와 같이 불변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3이라고 하는 숫자가 갖는 종장 첫 구의 의미는 작품 전체의 축이 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 3이라는 숫자가 무너지면 작품의 전체 균형이 흔들리게 되고 시조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가락이 뒤틀리게 된다. 1 이나 2 또는 4 라는 글자 수로 시작 했을 경우는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 놓임의 엮음 관계에 있어서 운율 관계가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3 은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요 구름판이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생활양식에서 3이 시사하는 바는 너무 다양하다. 모든 절기가 홀수로 들어 있으면서 무슨 날을 택일 받을 경우도 흔하게는 홀수를 선택한다. 사설시조에서도 종장의 3이 갖는 힘은 사람의 척추 신경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겉모양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매우 독특한 속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 또한 평시조와 대조적이라고 하겠다

생략과 함축으로 매우 근엄하면서도 간결한 평시조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닌 생활의 체험에서 얻은 사실적인 체험담을 갖고 자유롭게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것이 사설시조다 내용과 함께 해학이 번뜩이는 노련함이 돋보인다.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다라 앉아

건넌산 바라보니 백송골이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리닫다가 두험아래 자빠졌구나.

모쳐라, 날낸 나이기에 망정이지 에헐질 번 하괘라.

 

이쯤 되면 사설시조가 그냥 외설스런 내용만 수록 된 것이 아니다. 한글이 창제되고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사설시조의 내용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평민층에서 느끼는 기득권층에 대한 반감은 더욱 노골화 되고 권세에서 밀려나 낙향한 비주류를 통해서도 양반네의 이중적 허풍이 드러나기도 한다

파리가 힘 못쓰는 백성이라면 그 백성들을 괴롭히는 두꺼비와 두꺼비를 위협할 수 있는 백송골이 더 높은 권세가를 상징하고 있다. 힘없는 백성을 괴롭히는 권세가도 자신보다 더 큰 권세 앞에서는 비굴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다.  날랜 나이기에 망정이란 권세 앞에서 시류에 따라 처신할 수 있는 아부근성이요 어혈이란 밥줄이 떨어지며 크게 다칠 뻔 했다는 말이 된다.  촌철살인 할만한  해학을  통해서 갖은자의 이중적 위선을 통쾌하게 벗겨내고 있다.

이렇듯이 다양한 속 모양을 엮을 수 있는 것 또한 45 자에 묶여 있는 평시조와 확연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ㅁ. 사설시조의 의미

 

사설시조와 평시조는 본적지가 서로 다르다. 어느 시대고 권세가와 평민 간에는 서로 다른 문화의 대립 각을 세우기 마련이다 .

조선은 크게 양반과 평민이라는 계급사회로 나누어져 있었다. 자신의 지식이나 권위적인 위치를 나타낼만한 것으로 양반네는 평시조를 만들어서 창으로 노래했다. 조선개국과 함께 엄한 사회질서를 주창하던 당시엔 엄청난 인기를 갖게 된 시조다.  이에 반해서 서민들은 사설이라고 하는 자유스런 그릇을 쓰고 있었다. 어쩌면 생략의 절제미로 멋을 찾는 3 장 6 구의 그릇이 평민들에게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갓 쓰고 두루마기에 대님 매는 절차 보다는 중의적삼에 수건 하나 질끈 동여매는 편안한 생활 습성에서 사설이라고 하는 넌출거리는 가락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본래 시조는 시로서의 문학 이라기보다는 창으로 불러지던 노랫말이었다. 인쇄문화가 발달하고 기록이 활발해 지면서 시로서의 현대시조가 자리 잡기 시작 했고 그 이전까지는 창으로 불러지던 고시조에 속한다. 조선 말기 개화문화가 들어오면서 문집이 나오게 되고부터 문학으로의 현대시조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창으로 불러지던 고시조의 가사에 맞서 서민층에서는 이미 활발하게 사설시조가 번지고 있었다

그 표현이 질그릇 같이 투박하고 소리 요란한 것이지만 풍자나 해학을 통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 자신들의 생활의 속내를 풀어내는 사설시조가 체질적으로 합당했다.  초기에는 성에 관한 내용으로 저변확대가 되었다고 하겠지만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개화되어 가면서 사설시조의 내용 또한 다양해지기 시작 했다. 양반네들조차 그런 그릇을 쓰고 싶었지만 쉽게 선택 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비록 餘技로 사설시조를 썼다 치더라도 깊은 골방에서 기녀들과 어울리는 수작에 불과 했을 것이며 이름을 내세우지 못한 작가미상으로 전해지는 것 들이었다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그토록 발단의 본적지가 다르다 보니 기득권층의 평시조에 눌려 긴 세월동안 핍박 속에 있었으며 그나마 오늘 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민초들의 문화로 맥을 이어왔다는 것에 증거 한다. 사설시조는 이미 조선시대의 민중시였으며 스피드를 자랑하고 있는 오늘날의 랩 음악을 실현했던 장르다. 사설시조야말로 우리민족이 갖고 있는 매우 독특한 문학 장르라고 하겠다.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울고

夕陽은 재를 넘고 갈길은 千里로다

저 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이별을 한탄하는 정한의 시조다. 어느 나그네가 주막 집 술청에 앉아 거나하게 박주 한 잔 하고 떠나야 하는 저녁나절 풍경이 선연하게 들어온다. 선비 정신과 함께 풍류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음풍농월이다.

 

중놈도 사람인양 하여 자고가니 그립다고

중의 松낙 내가 베고 내 쪽도리 중놈 베고 중의 장삼내가 덮삽고 내치마 중놈

  덮고  자다가 깨달으니 둘의 사랑이  송낙으로 하나 족두리 하나

이튼날 하던 일 생각하니 흥글항글 하여라

                                   -작자미상 -

 

자신이 격은 성관계에 대한 만족감과 함께 아쉬움을 솔직하게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파계승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현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풍자가 들어있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묘사다. ' 흥글항글' 이라는 표현으로 비밀스런 성관계였지만 싫지 않았던 쾌감이었으며 남정네는 떠나고 없는 지금까지도 흥분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땅바닥으로 떨어진 승려들의 신분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어도 탈이 생기지 않던 시절 얘기다. 평시조와 비교하여 표현이 자유스럽고 너름새가 좋다 

 

이야기를 얹는 다는 일은 포괄적이면서 관념으로 흐르기 쉬운 시조문학에서는 특히 요구되는 사항이다

중장의 이야기가 길어짐에 따라 소리를 내서 낭송을 하게 되면 본래의 음률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읽는 속도가 붙게 되며 결국은 결구로 종결지을 수 있는 종장은 단시조 형식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긴 사설의 중장을 한껏 뒷받침 해 주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시조역시 표현의 근간으로 비유법을 쓰고 있다

대표적인 비유법으로 직접비유와 간접비유가 있다. 대부분의 시조작가들은 직접비유는 작품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시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직접비유와 간접비유를 적절하게 엮어가는 것이 효율적이다. 맺고 풀고 감치고 시치는 엮음 속에서 작품의 통일성과 함께 주제가 선명 해 진다면 감동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맺고 풀어주는 반복에서 의미 전달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발표되고 있는 평시조 작품을 보면 지나친 은유로 인하여 심한 경우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이상한 시조가 나오고 있다 표현의 기법으로 낯설기 경쟁 건너뛰기 경쟁을 한다. 어렵게 써야 현대시조가 아니다 그렇게 통일성이 없는 건너뛰기를 하므로 시조 한 수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다. 이 또한 45 자 라고 하는 한정된 제한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자 지나친 은유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한다면 사설시조야 말로 선명한 소설적 구성으로 보다 더 독자층을 시조문학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 한다

 

논밭 갈아 기음 매고 뵈잠방이 다임 쳐 신들메고,

낫 갈아 허리에 차고 도기 벼려 두러메고 무림 산중(茂林山中) 들어가서 삭다리 마른 섶을 뷔거니 버히거니 지게에 질머 지팡이 바쳐 놓고 새암을 찾아가서 점심(點心)도숡 부시고 곰방대를 톡톡 떨어 닢담배 퓌어 물고 코노래 조오다가,

석양이 재 엄어갈 제 어깨를 추이르며 긴 소래 저른 소래 하며 어이 갈고 하더라.

                                                                                      -청구영언-

 

농군이 나무하러 갔다가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일과를 구체적이며 사실적으로 노래한 사설고시조다

 

한盞 먹세 그려 또 한盞 먹세 그려

꽃꺾어 算놓고 無盡無盡 먹세 그려 이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어 매어가나 流蘇寶帳에 萬人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白楊숲에 가기곳 가면 누른해 흰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야 뉘 한盞 먹자 할고

하물며 잔나비 파람 불제야 뉘우친들 어떠리

                                                                 송강 정철

 

과연 송강 다운 사설이다. 정치인이면서도 시문을 짓고 부르기를 즐겼던 송강의 풍류는 사설시조라는 넓은 멍석을 깔고 앉아 한 잔 먹자는 권주가로 인생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전해오던 사설시조와는 또 다른 당대 최고의  선비 시인이 쓴 것으로 내용도 한결 활달하고 가락도 넌출 거린다. 그러면서도 시조 본래의 율격이 잘 유지되다 보니 자연히 읽는 속도가 붙게 된다. 이백 두보의 한시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나 어욱새 속새 덤기나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쇼쇼리 바람과 같은 순수한 우리말로써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했다. 난삽한 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술을 좋아했던 호방한 시인의 체취가 잘 나타나면서 허무 적막함 애수의 정조가 진하다

이렇듯이 사설시조는 평시조가 갖지 못하는 이야기가 선명하고도 다양한 표현으로 우리가락을 잘 살려내는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다   

 

ㅁ 사설시조는 펼침의 시조다.

 

그 동안 시조가 문단의 푸대접을 받아 오면서 독자를 차츰 잃어가고 있었다면 사설시조는 시조 안에서 조차 푸대접을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내 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3 장 6 구의 정형만이 오직 시조문학의 精髓라고 주장하는  일부 시조인들은 사설시조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설시조가 생성하던 초창기의 분위기로 볼 때 오직 평시조만이 시조의  정수로 보면서 진정한 전통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사설시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설시조는 펼침의 시조다

사설시조야 말로 정형은 정형이되 펼쳐진 3 장 구조의 定型而非定型이란 용어가 어울리는 시조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생활 밑바닥에 같이 흘러내린 생활의 문화로 가능하게 되었다. 멀리는 공후인이나 정읍사 향가 같은 말 놓임에서 시작 된 가락이 반복과 전개의 펼침으로 확대되어 별곡이 이루어지고 민요가 이루어졌다

모두 곁으로 가 보면 시조가락과 손잡을 수 있는 것들이다.

 

"살어리 살어리랏다/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멀위랑 래랑 먹고/쳥산애 살어리랏다

 

" 가던 새 가던 새 본다/믈 아래 가던 새 본다/잉무든 장글란 가지고/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청산별곡 일부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 주글만뎡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 주글만뎡

정(情) 준 오낤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경경(耿耿) 고침상(孤枕上)애 어느 자미 오리오

서창(西窓)을 여러하니 도화(桃花) 발(發)하두다.

도화난 시름 업서 소춘풍(笑春風)하나다 소춘풍 하나다.

                                                           만전춘별사 일부

 

 시조가 형성되기 전의 노래로 알려지고 있는 것들로 시조가락과 맥을 같이 한다 만전춘별사는 시조의 형태에 매우 가깝게 다가와 있다.

그러면 민요 한가락을 옮겨 보자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께눈에 노가지 나무 뻐덕지게 부끔떡 세쪼각을 새불에 바싹 매달고 염전석양 웃짐 지고 강능 섬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구비 부디 잘 다녀 오세요

 

너나내나 줄어지면 육전장포 찔끈물ㄲ어 소방산 대틀위에 덩그렇게 떠들너 메고 상두꾼아 발맞춰라 초롱꾼아 붙들어라

어호넘차 다버리고 사실 공동묘지 홍대칠성 깔구덮구 살짝 누어가며는 푹 죽어질 인생을

알뜰한 싫은 소리두 하지두 마소.

 

우리네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안안팍 곱사응이

한짝다리 장치다리 한짝팔은 곰배팔이 북통배지 장구통 대가리 벼룩먹은 당나귀에 은전한짐 짊어지고 영월청천 꼴두바우에 화토재치러 갔는데

이십공팔 삼십대비만 펄펄 일어주게.

 

이달으는 팔월이요 저달으는 구뤌이요

이팔구월 양달간에 앞남산 황국단풍은

노르르락 붉으르락 노릇노릇 들어라

꽁지갈보 뒤를 딸아서 동박따루 갈란다

 

정선읍내 물레방아 허풍선이 궁글대는

사시장천에 물살을 안고서 이리 빙빙 도는데

당신은 날 안고 돌줄을 왜 모르나

                                         -정선 엮음 아리랑-

 

어느 시기에 나온 민요 가락이던 사설시조 가락은 정선아라리 엮음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가사만 갖고 보면 분명 사설시조다.엮음 아라리의 가락도 자진모리 휘모리로 거침없이 빠른 속도를 갖는다. 그리고 마지막 소절에 와서 사설시조의 종장처럼 제자리로 돌아간다. 너무 흡사한 사설시조다. 이미 이렇게 민중의 노랫말까지 사설이 깊이 배어 들어있다. 그렇지만 우리 시조 단에서는 오직 평시조를 지켜야 한다는 아집으로 이런 현실을 짚어보지 못했다. 

한민족이 작곡했다고 할 수 있는 민요는 시조역사 보다 훨씬 더 멀리 인간이 노동을 하고 싸움을 하던 원시시대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래란 문자가 전하지 못하던 시대부터 입과 입을 통해서 전해저 온 것으로 문자가 생기기 전까지는 문학을 대신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럼 또 판소리 한 대목을 보고 가자

 

지팡이 한 끝 잡고 아비 앞을 인도하여 원근촌 다니면서 조석이면 밥을 빌고 낮이면 전곡 동냥,그렁저렁 지내어서 일곱 살이 되어지니 심청이 부친전에 여짜오되

                                                                           심청전 일부

 

 

이 때에 주도독은 화전기계 준비하여 노숙과 한가지로 동남풍을 기다릴제, 아색이 청명하여 미풍 불기터니 삼경이 지난 후에 바람소리 들리거늘 도독이 나서보니 손사방에 박힌 깃발 술해방에 펄펄 풍겨 동남풍이 완연쿸나.

                                                                      적벽가 일부

 

 

무대와 음악 사설로 엮어지는 판소리 사설이야말로 어디를 펼쳐 봐도 문장 마다 사설가락으로 엮어져 있다.우리의 전통적인 사설가락으로 엮어간 판소리 사설은

음악과 무대를 통하여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지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음악이나 시문학을 통사적으로 살펴볼 때 언제나 엮음 사설로 조응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푸대접을 받아온 사설시조의 위상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ㅁ. 평시조 연작과 사설시조

 

처음 시조를 쓸 때만 해도 한문 문화권에 있었고 선비문학으로 시작된 태생적 영향으로 진한 서정을 바탕으로 한 음풍농월 이었다.그 시대 문화에 맞아 떨어지는 가락이었다.

19 세기로 너머 오면서 새로운 문학사조로 신체시가 나오게 되고부터 시조문학은 더 많은 신시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우리의 전통문학을 자위하면서 유유자적하던 시조문학도 정신이 버쩍 들게 되었다

세상이 개화 되면서 문학 세계도 같이 큰 눈을 뜨게 되고 세계화로 현대화로 눈이 밝아지고 넓어지는 판국이었지만 시조문학은 오히려 우리 것을 잘 지켜 나가야 한다면서 틀을 지키기에 온 힘을 다 했다.

우리말이 갖는 율격 자체가 규격화 되어있는 일본이나 중국의 한문시와는 사뭇 다르다. 말과 말의 연결고리가 말의 진폭으로 파장이 다른 우리말을 갖고 이웃나라 흉내를 내느라고 말의 숫자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인식은 지금 살아있는 일부 현역 작가들까지도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

돌이켜 보면 이 때 큰 패착을 놓은 셈이 되었다.

오히려 시조를 두고 양장시조니 4장시조니 하고 시험적으로 들고 나온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 두 줄 형식이나 네 줄 형식은 본래 우리 시가에 있던 것이었지만 하이쿠나 한시를 차용했다는 오해를 면키 어렵게 되었고 실패하고 말았다. 3 장 6 구의 글자수를 맞추자고 했기 때문에 시조의 형식이 줄어든 경우는 없지만 한편에서는 오히려 엇시조니 사설시조니 하면서 가락이 자꾸 늘어나는 자연스런 추세에 있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선 말기에서부터 일제치하를 격어 온 국난 시대에도 윤동주나 지용 육사같은 자유시 작가들은 우리말 율을 잘 살리면서도 민족혼을 일깨우는 작품 발표를 함으로써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시대에  매우 적합한 그릇을 갖고 있는 사설시조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시조는 원래 줄어들지는 않고 필요에 따라 늘어나 상당한 길이를 가진 사설시조를 이루어, 정형을 자유스럽게 활용할 수 있는 진폭을 크게 확대했었다. 그런데 시조는 짧은 정형시여서 소중하다는 주장을 고수하기 위해 시조 부흥 론을 열심히 펴면서 사설시조는 멀리하고 언급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더구나 사설시조의 현실 인식과 세태풍자가 하층 민중의 의식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시조가 민족문학이라고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민족문학은 순수하고 고결한 민족정신의 구현이므로 단순해야 하고, 민족 구성원이 널리 참여해 민족의 당면 문제를 다루는 잡다한 요구는 증류해야 마땅하다고 믿어 시조부흥운동을 외곬으로 몰고 갔다 -(대한매일신보) (조동일의 한국문학 통사.지식산업사)-

 

평시조의 연작을 쓰면서 시조부흥을 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민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가사문학이나 민요가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는 길을 터주게 되었다. 평시조가 놓친 공간을 메워주면서 치고 나갈 수 있는 사설시조의 역할을 활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처음에 외설스런 문장으로 시작된 사설의 족보는 두고두고 천대를 받은 셈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시조작가들은 오직 평시조를 잘 지키고 보전하는 것만이 시조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거의 신앙적이었다. 이 시대에 무엇이 문제이고 시조가 어떤 역사적 바탕에서 어떻게 발전 해 나가야 하는 것인가를 속으로 살피기보다는 좌파들의 공격 앞에서 교세 확장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인구만 늘어나면 힘이 되는 줄 알았다. 아직까지도 그렇다.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흘러가는 중에 시조만을 고집스럽게 써 보지만 시조문학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입장에서 시조 작가만 양적으로 늘려 놓고 고무되어 있는 입장이다. 다만 때는 좀 늦었지만 사설시조 문학회가 창립되고 몇몇 시조작가들이 사설시조를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일반 독자로부터 시조문학이 계속 외면을 받고 있다는 데에 있다

왜 일반 독자들은 자유시에 비해서 현저하게 시조를 읽지 않는 것일까 라고 하는 의문과 질문은 끊임없는 화두다. 분명 거기에는 현대시조 라고 하는 우리의 문학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화두는 야릇한 호기심과 함께 문제의식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학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긍지의 시조문학이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인기가 없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시조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과제였다. .

오직 고집스럽게 시조만 써 오면서 경험적으로 얻은 처방이 바로 시조문학에서 자랑하고 있는 반복적인 리듬의 가락 자체가 현대인들에게는 맞아들지 않는다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시조예술 6 호)

평시조의 연작은 읽는 재미를 잃었다. 그런 이유로 질 좋은 작품이라도 일반 독자들은 읽기를 꺼려한다. 문학성 좋은 시조를 써 놓아도 읽기에 재미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작가는 너무 억울하고 손해가 많다. 자유시에 비해서 다만 시조라는 이유로 더 많은 사람이 읽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시조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시조의 역사성을 예찬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독자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터놓고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현대시조는 고시조와 다르니까 현대적인 시적 발상이 있어야 한다

시조는 자수가 아니고 음보의 관계니까 글자의 가감이 필요하다

시조니까 현실참여 작품도 써야 한다 는 둥의 해묵은 원론만 반복 할 뿐 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돌아볼 때 연작으로 시조를 활성화 시키자고 할 즈음이 고시조의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시조를 혁신 시키자고 하면서 현대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했지만 담아야 하는 그릇은 한 치도 바꾸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현대시조로 넘어 오면서 완고한 3 장 6 구의 모양도 함께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시조 기본의 정형을 현대문학이 요구하는 쪽으로 이어서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평시조는 단수 짓기로 돌아가서 대중적인 호응으로 누구나 시조 한 수쯤 지을 수 있고 시조창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국민시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과 같이 3 수 4 수 연작으로 쓰는 경우 다양한 사고와 음악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반복되는 단조로운 가락이 지루하기 때문이다  

 

막힌 시조를 열기 위한 대안으로 구조적으로 내용적으로 다양한 사설시조를 창작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 이 시대의 독자들과 같이 호응할 수 있는 매우 합당한 그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시조 연작은 같은 한 편의 작품이면서도 여러 편을 읽는 느낌 대문에 반복 리듬이 더 지루하지만 사설시조는 길던 짧던 내처 읽어가는 느낌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평시조 연작 보다 자연스럽고 흥미롭다.

지나친 은유법으로 꽁꽁 묶어 놓은 평시조 표현 방법 보다는 작품 전개상 맺고 풀어주는 이야기 속에 여러 가지 형태의 시적 효과를 꾀하는 사설은 언어의 다양성으로 읽는 재미가 더 하다.

 

구룡폭포 / 조운

 

사람이 몇 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劫이나 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玉流 水廉 眞珠潭(옥류 수렴 진주담) 다 고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 풀 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連珠八潭(연주팔담)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 보느냐

 

마침내 가람의 연작시조 난초와 같은 시대에 탄생한 사설시조다.

우리는 흔히 조운의 구룡폭포에 와서야 마침내 현대적인 사설시조를 이루었다고 평한다. 그의 시세계와 인간됨이 三冬을 돌아 나오는  물소리 같이 차고도 맑다.

외설스럽고 난해한 내용을 앞세워 평민의 정서를 대변했던 사설시조가 양반계급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면서 가리어 있었던 것이 조운에 이르러 새로운 길을 활짝 열었다고 하겠다

폭포 이미지는 일견 민족의 해방을 염원하는 한없는 그리움이며 격정이기도 하다.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폭포같이 용솟음 치고 싶은 해방의 염원이 그 안에 방울방울 이슬로 맺혀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속상한 치욕 속에서 한방울 물이 되어 굴러 보고 싶은 울분이 또한 은유적으로 잘 표현되고 있는 사설이라고 하겠다

마침내 외설스러운 만횡청류로 취급 되면서 선뜻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사설시조의 옷을 이토록 산뜻하게 갈아입고 나왔지만 오랜 관습의 시조문학에서 조차 사설시조는 활성화 되지 못했다.

쓰기에 편리하고 좋은 그릇을 얻었지만 평민층이 먹던 그릇이라 하여 대중화 되지 못했던 것이다

 

                    -시조예술 2010 년 가을호에서 -

 

 

 

 

 

 

 

 

 

 

 출처 :김문억의 시조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 김문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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