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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 예술 ◑

시의 모호성(模糊性)

by sang-a 2008. 2. 24.

시의 모호성(模糊性)

시는 주관적인 정서를 집약적인 형식을 통해 표현한 글이므로 산문에 비해 애매모호하여 난해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들 한다. W. Empson은 약관을 조금 넘어선 젊은 나이에 현대시의 특성을 '모호성(ambiguity)'이라고 지적하고 일곱 가지 유형을 들어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일곱 가지

유형을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그의 이론을 좇아 논지를 전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대시의 모호성 내지는 난해성의 요인이 되는 것들이 무엇일가를 내 나름대로

들춰보고 아울러 그에 대한 반성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1) 시어의 다의성(多義性)

원래 언어는 시대나 사회를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단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는 다양하기 마련이다. 거기에다가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까지를 감안한다면 그 의미망의 유동적 구조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예를 들어 '솔(松)'이라는 하나의 시어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것은 육송, 해송, 백송, 적송 등 여러 종류의 소나무들을 지시하는 외연적 의미를 지니는 한편 또한 이것들이 환기하는 정서 곧 절개, 지조, 인고, 불변 등의 내포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 시어와 시어들 사이에는 외연과 내포의 복잡한 의미망이 독자들의 머릿속에 각양각색으로 형성된다. 산문은 그 의미망의 객관성을 지향하는데 시는 그 의미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 산문은 객관적인 정보나 지식의 전달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그렇고 시는 주관적인 정서 전달에 기울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2) 구문 구조의 애매성

시는 다양한 행바꿈, 문장부호의 생략, 자의적인 띄어쓰기 등으로 말미암아 규범문장 구조와는 다른 낯선 글이 되기도 한다. 구문의 구조도 애매하여 의미의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어저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다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타야/ 보내고 그리는 정을 나도 몰라 하노라'
黃眞伊의 이 시조 중장에 나온 '제'는 앞의 '가랴마는'의 주어인지 뒤의 '보내고'의 주어인지 불분명하다. 전자라면 '제'가 님이지만 후자라면 '제'는 시적 화자가 된다. 

3) 고도의 은유
시의 대표적인 표현 기법의 하나는 비유 중에서도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비유는 원래 동일성에 바탕을 둔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인데, 현대시에서의 은유의 구조는 오히려 비동일성을 지향하는 쪽으로 변해 가고 있다. 말하자면 이질적인 사물의 결합을 시도함으로 낯선 정황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李陸史의 <絶頂> 마지막 행이다. '겨울'과 '강철'과 '무지개'라는 이질적인 사물들이 빚어낸 난해한 은유 구조다.

4) 상징성

시적 언술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은폐지향성이다. 곧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히 감추어서 표현하려는 경향이다. 은유도 그러한 성질을 지닌 표현기법이지만 대표적인 것은 역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징의 장치가 일반화된 관습적인 것이라면 독자들이 쉽게 그 상징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작품에서만 시도되는 작자의 개인적인 상징일 경우는 그 상징의 열쇠를 풀기가 쉽지만은 않다. 뿐만 아니라 상징의 본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그 본의에 대한 다양한 추적이 또한 모호성을 빚기도 한다.

5) 시의(詩意)의 비의성(秘意性)

오묘한 철학적 담론을 담은 시라든지, 고승들의 신비한 선적(禪的) 체험을 기록한 선시(禪詩) 같은 작품들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시인의 깊은 시의(詩意)가 언어의 기능을 능가한 심오한 것이어서 표현이 내용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거나, 독자들의 정신적 수준이 시인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여 자연스런 교감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6) 고의적 비문(非文)

전통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법들이 있다. 심층심리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초현실주의 시는 소위 자동기술법에 의해 작품을 만들어낸다. 작품에 대한 어떠한 구상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작품화한다. 따라서 이러한 작품들은 어떠한 논리나 윤리의식의 제한도 받지 않고 시간적 공간적 질서의 구속으로부터도 자유스럽다. 한편 대상들의 지상적 정황을 우그러뜨리고 대상과 대상들의 새로운 낯선 관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무의미의 시 역시 일상적 논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러한 시들은 이해되기를 처음부터 거부한 것들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일상적 의미가 없다. 따라서 비구상화를 감상하듯이 독자들은 그러한 작품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7) 졸문(拙文)

시인의 능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혹은 한 작품에 쏟는 시인의 성실성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작품의

성취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빚어지는 모호함이다.

앞에서 나는 일곱 가지 항목을 들어 현대시의 애매성 내지는 난해의 요인에 대해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유들로 말미암아 현대시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고의적으로 이해되기를 거부한

작품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시인이 독자들의 공감과 이해를 기대하고 세상에 내놓는 경우라면 시의

모호성은 결코 시의 긍정적 기질로 평가되기는 어렵다.

풍성한 의미의 시어, 수준 높은 은유와 상징, 오묘한 시의(詩意) 등은 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수준 높게 구사되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모호하고 난해한 결과의 작품이 되어질 수밖에 없다면 이는 어찌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어떤 작품을 보다 명료하고 평이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호하거나 난해한 작품으로 만들고 말았다면 이는 시인의 태만에 기인한

것이다. 시의 모호성은 어찌할 수 없는 결과로 수용되는 것이지 시가 추구하는 본질이나 이상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의도가 독자들에게 보다 완벽하게 전달될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시인이 어디 있겠는가.

(임보 시인님의 강의) -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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