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작품 :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어느새 가버린 사랑을 추억하며 촉촉한 그리움에 젖게 된다.
사랑의 추억은 가슴 아픈 것인데도 이 시는 그것을 산뜻할 정도로 멋지고 세련된 감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첫 연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잊었어도 가슴에는 그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음을 말한다. 감각은
의지와는 달리 사랑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바람 불고 비가 오는 날과 사랑의 그리움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소재인데도 2연의 시어가 감동적인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잊지 못하지'라고 담담하게
읊조리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 가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백하듯 담담한 어조는 오히려 깊은
사랑의 상처를 짐작케 하여 우리의 가슴은 그만큼 아프다.
3연의 우리의 사랑은 '가고','떨어지고','사라진다', 나뭇잎처럼 무수하게......나뭇잎은 사랑의
상실을 시각화하여 보여 주기 위한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러나 사랑은 사라지는 것이고, 과거만이
남는 것이라 '해도' , 서정적 자아는 아직 할 말이 있다. 아무리 사랑의 상실에 대하여 담담하려 해도
추억만을 되뇌이며 과거로 남기려 하여도,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어 가슴엔 서늘한 바람이 분다.
사랑의 추억과 안타까움이 '내서늘한 가슴'이라는 촉각적 심상으로 감각화되면서 지금까지 시
전반에 흐르던 회고적 정서는 일순 산뜻한 긴장을 겪게 된다. 시의 정서에 세련미를 더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상징을 통한 함축적 의미가 시의 존재 방식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자.
이 시는 상징적 의미가 부족하고 대신 감성과 낭만이 주조이다. 박인환의 시가 센티멘탈리즘이라고
비판받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시에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감성의 표백에 그쳤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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