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죄, 아들의 죄 (유리왕과 해명)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 체계를 갖춘 고구려. 일찍부터 선진국인 부여,중국등과 싸우면서 커 온 고구려는 초기에 가장 풍부한 역사 기록을 남겼다.고대사의 숨은 이야기를 통해 살짝 엿보기로 한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 첫째는 도절, 둘째는 해명, 셋째가 무휼, 다음이 여진. 부여왕 대소가 서로 왕자를 볼모로 잡히자고 고구려에 요구했다. 강한 나라인 부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유리왕은 도절을 볼모로 보내려 했다. 도절은 두려워하며 가지 않았다. 이 사릴을 안 부여 대소왕이 크게 화를 내며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다행히 큰 눈이 내려 부여군이 많이 얼어 죽었고, 고구려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유약했던 도절은 일찍 죽는다. 둘째 해명이태자가 되었다. 해명은 형과는 달리 힘이 세고 용맹하였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는 때였다. 해명은 옛 수도인 졸본을 다스리고 있었다. 해명이 용맹스럽다는 소문을 들은 이웃의 황룡국왕이 사실을 확인할 겸 사신을 보내 활을 선물했다. "태자로 즉위함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가장 강한 활을 선물로 드립니다." 활을 받아 든 해명은 사신이 보는 앞에서 가볍게 당기더니 그대로 꺾어 버렸다.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못하기때문이다." 해명은 부러진 활을 사신에게 도로 건네 주었다. 이런 사실을 보고받은 황룡국왕은 분하고 부끄러워 유리왕에게 사신을 보내 격렬하게 항의했다. "친선을 다지려는 우리를 얕잡아 보고 힘으로 협박하는 것 아닌지요? 주변의 다른 나라에도 이 사실을 알려 공동 대응토록 하겠습니다." 국내성에 있던 유리왕은 이 말을 듣자 제멋대로 힘자랑한느 태자에게 불같이 화가 났다. 아직 힘이 약한 고구려였다. 주변 국가들을 모두 적으로 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유리왕은 재빨리 황룡국왕에게 전하였다. " 이번 활 사건은 떠러져 사는 해명의 개인적인 행동으로 고구려 와인 나의 뜻과는 전혀 다릅니다. 고구려는 평화를 사랑합니다.그 증거로 이처럼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킨 제 자식을 죽여도 좋습니다." 황룡국왕은 해명태자를 황룡국에 초청했고 해명은 쾌히 승락했다. 그러자 태자 측근의 한 사람이 간곡히 말렸다. "가뜩이나 활 사건으로 두 나라간에 사이도 좋지 않은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초청하다니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시지요." "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국왕인들 어쩔 것인가. 죽고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가서 죽을 운명이라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명은 길을 떠났다. 황룡국왕은 해명을 만나자마자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죽으러 온 해명이 전혀 동요하지 않자, 이 모습을 본 황룡국왕은 감히 죽일 수가 없었다. 솔직하고 기백이 있어 접하면 접할수록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오히려 잘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유리왕은 해명을 용서하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심하게 꾸짖었다. "내가 수도를 옮긴 것은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옛 수도에 머무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는 않고 네 강한 힘을 믿고서 이웃 나라와 원한만을 맺으니 아들된 도리로 그럴 수 있는 일인가?" 왕은 칼을 보내 자결케 했다. 해명이 즉시 실행하려 하자 옆에 있던 신하가 말렸다. "장차 왕위를 이으실 소중한 몸입니다. 어찌 함부로 목숨을 끊으려 하십니까? 지금 자결하였다가 그것이 만약 중간의 조작이라면 어쩌시렵니까? 그 동안 두 분이 떨어져 계셔서 오해가 쌓인 것입니다. 부디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러나 태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황룡국왕이 보낸 활을 내가 꺾은 것은 그가 우리나라를 가볍게 볼까봐 염려되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부왕은 불효자라 하여 심하게 꾸지람을 하셨다. 더군다나 벌써 이렇게 칼까지 보내셨으니 부왕의 뜻이 확고함을 알 수 있다. 내 어찌 여러 말을 하여 더욱 불효하겠는가. 당장 명령을 따르겠다." 해명은 평소 즐겨 말을 타던 여진 동원이란 넓은 들판으로 나갔다. 그는 칼 대신 창을 따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와 그 창 끝에 몸을 던져 죽었다.스물둘의 젊은 나이였다. 태자의 용맹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많은 고구려인들은 크게 슬퍼하며 해명이 죽은 벌판을 창원(槍原)이라하였다.
그 뒤 기록은 태자의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사당을 세운 것으로 끝난다. 유리왕은 해명이 가진 순수함과 용맹스러운 것만으로는 왕의 자질이 없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아니 그런 성격 자체가 유리왕과는 잘 맞지 않았다. 유리왕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극적인 포상책으로 군인들의 사기를 증진시켜 고구려보다 강한 선비족 등을 공격하여 승리를 이끈 왕이면서 동시에 부하들을 냉혹하게 다루었다. 제사 지낼 돼지가 달아나자, 이를 잡으러 간 부하들이 늪에서 겨우 잡아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돼지 다리를 칼로 끊은 적이 있었다. 유리왕은 하느님께 제사 지낼 짐승에게 어찌 함부로 상처를 낼 수 있나며 부하들을 사형에 처했다. 얼마 되지 않아 유리왕이 병이 났다. 부하들이 억울하게 죽어 생긴 병이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는 사과하였다. 또, 유리왕은 사랑하는 후궁이 떠나자 노래를 지어 불렀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는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운 이 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노닐거나 『 황조가 (黃鳥歌)』
이 얼마나 풍부한 감성인가. 그러나 평소 못마땅한 해명의 잘못에 대해 유리왕은 냉혹했다. 왕 측근에서 이를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일찍이 유리왕이 사냥을 가면 며칠씩 몰두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아 원로 신하 협보가 정치에 힘쓸 것을 간언하였다가 당장 파면되었던 적도 있었다. 협보가 누구인가? 선왕 주몽이 부여를 떠나올 때부터 고락을 함께 해 온 개국 공신 아닌가.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리왕은 다시 한 번 달라진다.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어 시체를 찾지 못하자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여 애통해 했다. 뒤늦게 비류 사람 제수가 시체를 발견하여 신고하자 많은 금과 토지를 주었다. 몇 달 뒤 왕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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