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에서 정치가로 (이사부와 거칠부)
"신라 장수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 지금도 가끔씩 불리는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 일부다. 이처럼 이사부는 울릉도를 정복한 장군으로 우리에게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의 울릉도 정벌은 6세기 신라의비약적인 발전을 연 신호탄이었다. 지증왕은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이사부를 실직주(삼척군)군주로 임명하였다. 그곳에 부임한 이사부는 지방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울릉도의 우산국을 정벌해야 한다고 보았다. 울릉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옥저 사람들이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을 바다에서 떠다니다 이 섬에 도착하여 살아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일찍부터 나름대로 작은국가를 이루며 계속 발전해 삼국 시대에는'우산국'이 있었다. 배를 댈 수 없을 정도로 험준한 화산섬인데다가 해전에 능한 그들의 사나움은 주변 국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육지에서라면 능히 그들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섬에 상륙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이사부는 꾀를 내었다. 그는 나무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우산국을 향해 떠났다.
입에서 유황불을 뿜어대는 괴물을 처음 본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육지 사람들은 90미터가 넘는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보기만 해도 놀라 도망가곤 했는데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배 위에서 적장이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땅에 이 맹수를 풀어 놓아 너희들을 밟아 죽이게 하겠노라." 우산국 우해왕은 공포에 빠진 부하들을 독려할 수도 없었다.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그들이었으나 소 이외에 커다란 짐승을 본 적 없는 우물안 개구리였다. 그것이 나무로 만든 모조품인 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우해왕은 마침내 항복을 결심하였다. 그는 적장을 향해 소리쳤다.
"항복하겠다. 그 표시로 여기 투구를 벗는다. 단, 조건이 있다. 그 괴물이 우리나라를 짓밟지 못하게 하라. 또, 이후로 그 괴물이 우리 섬을 지켜 주었으면 좋겠다."
말을 끝낸 우해왕은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사부는 왕의 소원대로 나무 사자를 바다에 던졌다. 우해왕이 벗어 놓은 투구는 투구봉으로, 물 속에 던져진 나무 사자는 사자암으로 해안가에 솟아 올랐다. 그것들은 지금도 남아서 우산국의 최후를 증언해 준다. 이 전설은 512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을 생생히 보여 준다. 이사부에게 이것은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 지나 진흥왕 때 그는 병부령으로 임명된다. 병부령은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한 당시 최고 요직이었다.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시키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하는 등 양국이 치열하게 다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틈에 이사부는 두 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이사부는 빼앗긴 성을 탈환하고자 다시 쳐들어온 고구려군을 격파시켰다. 이제 신라는 더 이상 후진국이 아니었다. 고구려, 백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라섰다.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백제는 한강하류 지역을, 신라는 상류 지역을 각기 차지하였다. 신라는 뒤이어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150여 년에 걸친 나.제 동맹을 신라가 깬 것이다. 격분한 백제 성왕이 귀족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신라 정벌에 나섰다가 신라 복병에게 살해되었다. 이사부가 20여 년 간 병부령으로 재임하는 중에 있었던 일들이다.
이사부의 뒤를 이은 사람이 거칠부였다. 이사부와 거칠부의 만남은 국사편찬의 일을 통해서였다. 이사부가 왕에게 나라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거칠부가 그 편찬 책임을 맡았다. 거칠부는 그 일을 잘 수행하여 『국사 』를 펴내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라 최고의 역사 기록이었다. 고구려 혜량법사가 법당을 열고 불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한 젊은 승려가 사람들 틈에 끼여 강의를 아주 열심히 듣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느 날 혜량이 그를 불렀다. "젊은 승려는 어디서 왔는가?" 사람 속을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혜량이 갑작스레 질문을 하자 젊은 승려는 사실대로 말했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혜량은 그 날 저녁에 젊은 승려를 은밀히 불렀다. "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다. 네 얼굴을 보니 평범한 승려 상이 아니다. 딴 생각이 있어 이곳에 온 것 아니냐?" " 변방에 태어나 배움이 부족한 터에 스님의 덕망을 듣고 제자가 되고자 찾아온 것뿐입니다. 부디 거절 마시고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내 비록 똑똑치 못하나 그대가 외국인임을 한누에 알 수 있다. 이 나라가 지금 비록 혼란하나 그대를 알아보는 자가 없으리라 여겨선 안 된다. 잡힐까 염려되어 일러주는 것이니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그가 즉각 떠나려 하자 법사가 덧붙였다. "그대의 관상을 보니 제비 턱에 매눈이라 장차 장군이 될 것이다.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여기 오게 되거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달라." " 이를 말씀입니까.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그리하겠습니다.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합니다." 살아 돌아간 이 젊은 승려가 바로 거칠부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남달랐다. 내물왕의 5대손이며 누이가 왕비(소지왕의 비)인 그야말로 명문집안 출신인데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을 유람하다 겁도 없이 적국인 고구려까지 염탐하러 들어갔던 것이다.
이후 혜량의 예언대로 거칠부는 여덟 명의 장군들과 더불어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싸움으로 죽령 이북의 10여 군을 차지할 수 있었다. 법사 혜량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큰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본 거칠부는 말에서 내려 큰절을 올렸다. "지난날 이고세 유학 온 제가 법사의 은혜로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만나 뵈오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나라는 혼란에 빠져 망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귀국에 가 불교를 널리 전하고 싶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안원와으이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두 왕자간에 내분이 벌어져 2,000여 명이 죽고 여덟 살 난 왕자가 양원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게다가 북쪽에는 돌궐이 성장해 유연(몽고계 유목국가)을 격파하고 고구려를 위협해 왔다. 이런 시기에 뜻있는 승려들은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거나 불료가 아직 발달하지 못한 일본에 전도하러 갔다.
혜량의 눈에는 신라가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나라였다. 그곳에는 자신이 할 일이 있을 것이었다. 거칠부는 혜량을 수레에 태워 신라에 모셔왓따. 거칠부는 진흥왕에게 법사를 소개하였다. 법사를 만나 본 왕은 대단히 기뻐하였따. 백성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은 허락하였으나, 이들 승려들을 교육시킬 고승이 없었던 신라엿다. 왕은 즉각 혜량을 승통으로 임명하였다. 혜량은 짧은 승려를 길러 냈다. 그 후 혜량은 백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고 토론하는 백좌강회와 전사한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한 팔관법회를 처음으로 열었다. 거칠부는 진흥왕이 죽자 진지왕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상대등이 되어 나라의 일을 전담하였다. 579년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던 그가 죽자 진위왕도 폐위되었다.
거칠부나 이사부는 점차 정치가로서의 역할이 커진 장군들이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장군은 누구였을까? 살아 있었다면 사다함이었을 것이다. 내물왕 7대손으로 화랑이었던 그는 562년 이사부 장군이 대가야를 정복할 때 열여섯의 나이로 출병을 자원하였다. 사다함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함께 종군하였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전단량이란 성문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왕이 공을 높이 사 노비 3백 명을 주자 사다함은 이들을 다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다시 토지를 주자 그는 거듭 사양하다 불모지를 택해서 받았다. 아직 미혼이고 경제 관념이 없는 그였다. 한창 화랑으로 활동중인 사다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친구였다. 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했던 친구 무관량이 병들어 죽자 사다함은 이레동안 밤낮으로 통곡하다 친구의 뒤를 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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