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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고대사의 숨은 이야기 3.

by sang-a 2009. 1. 13.

노래하는 스님들 (월명사와 충담사)

 

신라인들은 노래를 즐겨 불렀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 힘들고 어려울 때,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간절히 빌 때, 혼자서, 여럿이서, 다같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 가락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가사는 남아 있다.

『삼국유사 』에 전해지는 향가 14수가 바로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ㅅ한 작곡자 겸 가수가 바로 경덕왕 때 월명사와 충담사이다.

 월명사는 사천왕사에 거주했다. 그는 피리를 아주 잘 불렀다.언젠가 달밤에 길을 거닐며 피리를 불었더니 달이 그 소리를 들으려고 멈추었다고 한다. 그 뒤로 그 길을 월명리라 불렀다. 그의 이름이

월명사인 것도 비슷한 까닭이리라.

 죽음엔 순서가 없다더니 누이가 먼저 죽자 월명사는 무척 상심하였다. 죽은 누이를 위해 제를 올릴 때

월명사는 누이의 명복을 비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것은 동시에 그 자신을 위로하는 노래였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지전이 서쪽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누이가 지전을 노자로 삼아 극락 세계로 날아간 것이다. 다음이 그 노래다.

 

생사의 길이 여기 있음에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 말도 못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나고서도 가는 곳을 알 수 없구나

아, 극락 세계에서 너를 만날 날을

나도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   「제망매가 」

 

이 광경을 지켜 본 사람들은 모두 다 감동하였다. 이 노래는 급속도로 나라 안에 퍼졌다.

월명사의 이름도 나날이 높아졌다.

경덕왕 19년이었다.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승려를 불러다 꽃을 뿌리며 부처님께 공양하면 그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왕은 단을 만들고 청양루에 나가 인연 있는 승려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가 남쪽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와 제사를 주관하여 기도문을 쓰도록 명했다.

월명사가 사양하였다.

 "신은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겨우 향가만 알 뿐입니다. 불가인 범패에는 익숙치 못합니다."

 "이미 인연이 닿은 승려이니 향가를 쓰더라도 좋다."

월명사는 왕의 명령에 따라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오늘 이에 산화(散花) 노래 부르며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심부름을 하는 까닭에

멀리 도솔천의 미륵님을 모시는구나    「도솔가 」

 

 조금 뒤 해가 하나 사라졌다. 왕은 기뻐하며 월명에게 좋은 차 한 봉지와 수정 염주를 하사했다.

이때 궁전 서쪽 문에서 동자가 걸어나와 공손히 차와 염주를 받들고 다시 서쪽 문으로 나갔다. 왕은

월명의 종자로, 월명은 왕의 시종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종자 뒤를 쫓게 하였다. 종자는 궁궐 안의 탑

속으로 사라지고 차와 염주는 남쪽의 미륵상 벽화 앞에 놓여져 있었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미륵보살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왕과 신하들은 월명사를 더욱 공경하였다.

 경덕왕은 성덕왕의 뒤를 이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통일 신라의 전성기 때의 임금이다. 이런 때 해가

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천재지변을 정치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는 당시 사람들에겐 왕권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의미하였다.

 자연 재해가 자주 나타나자 상대등 김사인이 그것을 빌미로 왕에게 정치의 잘잘못을 호되게 따지는

글월을 올렸다. 그런데도 왕은 주,군,현의 명칭과 중앙 관직을 중국식으로 명칭을 바꾸는 등 적극적인

왕권강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타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월명사를 불러 도솔가를 짓게 한 것이다. 전통적인 것을

지키려는 귀족들에 대한 무마책이기도 하다. 즉, 중국식 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말로 된 향가를 지어

부르게 함으로써 전통 문화를 버리지 않았음을 과시한 것이다. 더불어 부처님이 신라 왕조를

버리지 않았음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굳이 인연이 있는 승려, 즉 향가로 이름난

월명사를 고른 것이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째 되던 해였다. 3월3일 삼짇날 왕은 귀정문 위에 올라가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누가 길에서 덕망 있는 승려를 한 분 데려올 수 있겠소?"

마침 위엄 있어 보이는 옷차림의 스님 한 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려와 왕에게 보였다.

 "내가 말하는 스님이 아니다.:

 또 다른 스님이 검은 옷을 입고 앵두나무로 만든 통을 둘러메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은

반가워하며 그를 귀정문 위로 안내하였다. 그가 둘러멘 통 속을 보니 차 끓이는 도구 뿐이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충담이라 호옵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매해 3월3일 삼짇날과 9월9일 중양절에는 남산 삼화령에 계시는 미륵세존께 차를 끓여 드린답니다.

 오늘도 삼짇날이기에 차를 끓여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차 한잔을 끓여 주겠소?'

 충담은 곧 차를 끓여 바쳤다. 향기부터가 달랐다. 맛 또한 독특하였다.왕은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하는 향가를 지으신 분이지요. 그 노래의 뜻이 아주 높다고들 하는데

나에게 들려 주실 수 있겠소?"

 

구름을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새파란 시내에

기파 화랑의 모습이 있어라

여기 냇가 자갈에서

화랑이 지니신

마음의 끝을 쫓으려 하네

아,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르을 화랑아            「찬기파랑가 」

 

충담의 노래르 ㄹ들은 왕은 감동하였다.

 "나를 위해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는 노래를 지어 주오."

충담은 즉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왕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시라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서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구물거리며 사는 백성에게

사랑을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라

아아, 왕답게,신하답게,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라              「안민가 」

 

왕은 무척 기뻐하며 충담을 왕의 스승으로 봉하였다. 그는 굳이 사양하고 앵통을 들고 다시 길을

떠났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이런 노래를 지어 줄 것을 부탁한 것인가.

석 달 후 경덕왕은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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