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사랑 노래
황 동 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용택 시인의 감상......
'추위 환한 저녁 하늘'이란 말이 좋다.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이란 말도 좋고.
'우리와 놀던 돌'이란 말도 좋다.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란 말도 좋고.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란 말도 가슴 캄캄하게 한다.
이 시는 눈발 속에 서 있는 한 그루 푸른 소나무처럼 우리 가슴속에 떠오르는
아스라한 한 장의 수채화다. 아, 그 겨울에 돌아온 '동여맨 편지'.
그 날 창 밖을 바라볼 때마다 눈은 왜 그리도 퍼붓던지.
........<김용택이 사랑한 시>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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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미당 서정주는 월간지 ‘현대문학’ 11월호에서 약관(弱冠)의 신예를 다음과 같이 추천한다.
‘군의 시에서 보게 되는 지성의 움직임도 우리에게는 많이 귀(貴)헌 것이다. … 지성을 서구적 기질에 의해 흉내낼 줄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속에서 그의 이런 일은 중요헌 것이다.’
이로써 시인 한 명이 세상에 나온다. 군의 이름은 황동규.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보통명사가 된 그 이름이다.
시인 황동규가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그는 ‘현대문학’ 58년 2월호에 ‘시월’이, 같은 해 11월호에 ‘즐거운 편지’와 ‘동백나무’가 추천되면서 등단 절차를 마쳤다. 요즘처럼 신춘문예가 흔치 않던 시절,
문예지에 시 세 수 실을 수 있으면 시인이 됐다. 황 시인과 함께 등단
50주년을 맞은 고은 시인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
2월의 첫날, 황동규 등단 50주년 기사를 내보내는 건 이 때문이다. 50년 전 오늘이, 황동규가 한국 시사(詩史)에 처음 등재된 날이어서다. 더군다나 시인은 기념행사 하나 마련해 두지 않았다.
그는 “요란하고 번잡한 건 체질에 안 맞는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실에서 시인을 만났다. 영문학과 교수에서 퇴임한 게 5년 전이지만, 시인은 여전히 일주일에 사나흘 연구실에
나온다고 했다. 칠순 넘은 시인이 손수 차를 대접했다. 맛이 깊었다.
-50년 전에 미당 선생이 뭐라 하셨나요?
“아버지를 넘어서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미당은 컬러풀(colorful)한
사람이었습니다. ‘컬러풀’이 사람을 형용할 때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우리말을 못 찾아
그냥 ‘컬러풀’이라 하겠습니다. 훗날 단 둘이 있을 땐 예술가로서 종종 부딪치기도 했지요
(알려진 대로 시인은 소설가 황순원 선생의 장남이다. 시인은 환갑 즈음에서야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던 것 같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
-발표한 작품이 얼마나 될까요.
“700편이 조금 넘습니다. 시집은 시선집 빼고 13권입니다.”
-어느 시집을 마음에 두십니까.
“요즘 들어 상상력이 더 활발해진 걸 느낍니다. 앞엣것들보다 근자의 것이 더 마음에 듭니다. 최근에 시작한 ‘무굴일기’는 역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이 달라지셨나요.
“그런 건 없을 테고, 생각은 분명 달라졌습니다. 귀 수술을 했을 때니까 환갑 즈음이었습니다.
별 것 아닌 치료로 알았다가 얼굴에 마비가 왔거든요. 평생을 일그러진 얼굴로 사는 건 아닐까,
혼자 공포에 떨곤 했습니다. 그때부터 시 쓰는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시 한 편과 함께 서너 달을 삽니다. 단순한 퇴고의 개념은 아니고, 시와 대화를 합니다.
오랜 대화가 끝난 뒤에야 시를 발표합니다. 7∼8개월을 함께 산 작품도 있습니다.”
-선생의 시 세계는 50년 동안 한자리에 머문 적이 없습니다. 선생의 시 세계를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변모의 시인이라고. 60∼70년대엔 체제 비판적인 작품도 썼지요.”
-연애시도 많았지요. 아직도 많은 독자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로 시작하는 ‘즐거운 편지’를 줄줄 외우고 다닙니다.
“본래 서정시의 뿌리는 연애시입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요. 삶에 대한 사랑이 연애시의 옷을 입고 나왔을 뿐입니다.”
-선생은 손수 만들어낸 단어가 유난히 많은 시인입니다. 당장 ‘홀로움’이란 시어가 떠오릅니다.
“미국 버클리에서 6개월간 혼자 지낼 때 생각해낸 말입니다. 혼자 사는 것의 즐거움을 깨달은
외로움이라면 맞겠습니다.
‘사랑노래’란 표현도 제가 먼저 쓰기 시작했지요. 맨가을·무추억·초밤 같은 시어도 있고요.
‘뼝대’란 강원도 말을 아십니까. 밑에서 올려다본 벼랑을 이릅니다. 벼랑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지요. 좋은 말을 만들어내는 건 시인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왜 수많은 독자가 수십 년 동안 선생의 작품을 아끼고 사랑할까요.
“글쎄요. 다만 나는 읽지 않는 시를 왜 쓰냐는 입장입니다. 독자를 위해 쓴다는 대전제 같은 게
항상 있지요.”
-선생에게 시란 무엇입니까.
“한두 마디로 말하기 힘든 것입니다. 저에게 시는 ‘참기 힘든 무엇’입니다.”
-그럼 좋은 시란 무엇입니까.
“짜임새가 있어야 하고, 시 안에 인간이 있어야 하고, 삶의 섬광 같은 게 있어야 하고, 우리 시와 세계 시의 흐름에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희의 시인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걸 시인은, 시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죽음 따위로 두려움에 떨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이치를 시가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그랬다. 시 안에서 그는 죽음을 초월해 있었다. 아니,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비껴 서 있었다.
하물며 시 앞에서도, 황동규는 담담했다.
“시가 먼저 대화를 그만두자고 하면 기꺼이 시를 그만둘 것입니다.” 이건, 어떠한 경지였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황동규=1938년 평남 영유군 숙천 출생. 아버지가 소설가 황순원(1915∼2000) 선생이다.
대구로 피란갔던 51년, 길바닥에서 껌을 팔기도 했다. 전쟁 뒤엔 서울로 올라와 서울중·고교를
다녔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든 것도 그맘때. 하나 발성에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 문학에 뜻을 둔다.
고3 시절이었던 56년, 한 살 연상의 여인과 짝사랑에 빠진다. 그 여인에게 보내는 연가가 바로
‘즐거운 편지’다. 57년 서울대 영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58년 시인이 된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68년 서울대 전임강사가 된다.
이후 시인이자 영문학자로 평생을 산다.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197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미시령 큰바람』(1993) 『풍장』(1995)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2000) 『꽃의 고요』(2006) 등 다수
미당문학상(2002)·이산문학상(1991)·대산문학상(1995)·현대문학상(1968)·만해대상(2006)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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