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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고구려 역대왕 계보

by sang-a 2007. 3. 8.

 

고구려 역대왕 계보

 

1대 동명성왕 : 기원전37년~기원전18년

성은 고, 휘는 추모. 동부여의 금와왕의 막내아들.

대소태자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함

 

2대 유리왕 : 기원전 19년~18년

기원전 19년에 어머니 예씨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졸본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태자로 인정받고 고구려 제2대 왕이 됨

기원전 17년에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음

3년에는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음

 

3대 무신왕 : 4년~44년

유리왕의 셋째 아들.

14년에 태자로 책봉됨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병합시킴

그 해 개마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함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함

 

4대 민중왕 : 44년~48년

대무신왕의 아우.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함

유언에 따라 민중원 석굴에 장사를 지냄

 

5대 모본왕 : 48년~53년

대무신왕의 아들.

49년에 한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음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

결국 신하 두로에게 피살됨

 

6대 태조왕 : 47년~165년

유리왕의 손자이다.

56년에 동옥저를 정벌,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함

72년에는 부족장인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함

121년 한나라의 요수현을 공격하여 서북면의 영토를 넓힘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함

165년,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 됨

 

7대 차대왕 : 73년~165년

태조왕의 동생.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함

147년, 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148년 태조왕의 태자 막근마저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 당함

 

8대 신대왕 : 165년~179년

태조왕의 계제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

둘째형인 차대왕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함

166년 좌·우보의 직제를 국상으로 고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

169년 한나라의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함

170년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함

 

9대 고국천왕 : 179년~197년

신대왕의 둘째 아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고 대승함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품

194년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줌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꿈


10대 산상왕;197년~227년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

208년에 서울을 환도(중국 퉁거우 지방)로 옮김

217년에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함

 

11대 동천왕 : 227년~248년

산상왕의 아들.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함

이때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김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음

 

12대 중천왕 :  248년~270년

동천왕의 맏아들.

동생 예물과 사구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함

 

13대 서천왕 : 270년~292년

중천왕의 둘째 아들.

280년 숙신이 내침하자 동생 달고를 보내어 이를 격퇴함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소발 등을 주살함

 

14대 봉상왕 : 292년~300년

서천왕의 태자.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숙부 안국군을 살해함

이듬해 동생 돌고마저 사사함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의 침입을 격퇴함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함

 

15대 미천왕 : 300년~331년

서천왕의 손자.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함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함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함

313년 낙랑군을 공략, 낙랑군을 멸망시킴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음

 

16대 고국원왕 : 331년~337년

이름은 사유다  국강상왕이라고도 함 314년 태자의 책봉됨

331년 아버지 미천왕이 죽자 왕위에 오름

즉위하자 평양성을 증축 국내성을 쌓 342년 환도성으로 옳긴뒤

수차례 중국 연나라한테 칩입받음

그리고 선비족 모용괴가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자 모용괴가

아버지 미천왕의묘를 팜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주씨 왕비를 납치당함 

343년 동생을 연나라에 파견 미천왕과 왕비를 찾아옴

369년 백제의 치양(지금의 황해도 배천)쳤다 하지만 패하고

371년 평양성에서 싸우다 죽음

 

17대 소수림왕 : 337년~384년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18대 고국양왕 :  384년~391년

이름은 이련(伊連), 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는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 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또, 남쪽으로는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고, 389년과 390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 등

백제와 공방전을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북으로는 후연,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19대 광개토대왕 : 391년~413년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는데,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전하는 바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20대 장수왕 : 413년~491년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

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한 이래, 동진을 이은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소환요청을 거절한다든지,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 북위와의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연결을 가져, 479년에는 흥

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21대 문자왕 : 419년~519년

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족에게 멸망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임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함

 

22대 안장왕 : 519년~531년

이름은 흥안. 치세는 12년간

 

23대 안원왕 : 531년~545년

이름은 보영. 치세는 14년간

 

24대 양원왕 : 545년~559년

안원왕의 맏아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함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551년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25대 평원왕 : 559년~590년

양원왕의 태자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수·북제·후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함

일찍이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함

 

26대 영양왕 : 590년~618년

평원왕의 태자.

수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를 선공,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섬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함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함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을 함락함

612년 수나라 양제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을 시켜 살수에서 적을 섬멸함

 

27대  영류왕 : 618년~642년

영양왕의 이복동생.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침공 때 포로가 된 이들을 찾아옴

631년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에게 역사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됨

 

28대 보장왕 : 642년~668년

고구려의 마지막 왕.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함

661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함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당나라로 압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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