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건국은이렇게시작되었다. http://my.netian.com/~parhae/A1.htm
696년 영주에서 이진충의 난(거란인으로 거란국을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1년만에 실패한다.)이 일어난다. 이들 지역은 여러 민족이 생활하는 곳이라서,한족에 대한 반발 심리가 많았다. 당시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 3만여호가 살고 있었고, 고구려와 함께 대당 전쟁에 참가한 말갈족들도 포로나 노예로 잡혀와 있는 사람이 많았다.당시 이진충의 난은 성공적이었고,당을 압박하는 분위기였다.
고구려인 부대를 지휘한 대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과 대조영,말갈인의 추장 걸사비우가 이 반란에 참가한다. 그들은 요동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지만,이진충의 난 실패로 빠르게 동으로 이동하면서 각지에 흩어진 고구려인들과 말갈인을 수습하였다. 그들은 고구려.당 전쟁의 피해가 없었던 당과 멀리 떨어진 만주의 동북부 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그들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이진충의 난을 진압한 후 투항한 거란족 출신 이해고를 대장으로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추적한다. 처음으로 전투을 개시한 부대는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인 부대였는데 병력의 차이로 인하여 부대는 괴멸되고 추장인 걸사비우는 전사한다.이런 와중에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도 죽어 대조영은 혼자서 패전된 말갈인 부대를 수습하고,전열을 보강해 당과 일대 격전을 벌인다. 당의 이해고는 앞 전투의 승리에 자신감을 가지고,고구려인 부대를 얕잡아 보지만 천문령에서 매복한 고구려인 부대에 기습당하여 부대가 완전히 괴멸당한다.
이 전투가 유명한 '천문령 전투'이다.
대조영은 소규모 부대로 대 부대인 당의 대군을 전멸시키고 이해고는 수천명의 병력만 이끌고 후퇴한다. 당은 더 이상 군사력의 한계를 느끼고,대조영 세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천문령 전투는 발해국 성립과 직접 연결된 가장 의의 깊은 전투로서,어떠한 외부 세력도 발해국의 성립에 위험이 되지 않았다.당시 한반도의 동북부 지역과 만주 지역은 힘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당도 신라도 어떠한 외부 세력도 미치지 못한 이 지역에, 대조영 집단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고구려인들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이들 지역 및 말갈인 집단에 정치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중앙 통치 집단이 생기자,각 지역의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모여 대조영 시대가 끝나기 전에 대다수 옛 고구려 고토는 완전히 회복되었고,중앙 정부 역시 완성되었다.
대조영은 이 틈을 타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震國)이라 칭하였다. 그후 대조영의 세력이 계속 커지자, 당은 외교관계를 맺고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함으로써 국호를 발해라 부르게 되었다. 30년간의 노력으로 고구려인들은 나라없는 슬픔을 더 이상 느끼지 않고,예전의 고구려 시대만큼 강한 나라에서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발해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주체의식을 높이고, 외교적으로는 인접국인 당과 신라와 항쟁하면서 멀리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근공원교(近攻遠交)정책을 취하였다. 제3대 무왕은 국력의 신장에 따라 수도를 동모산(東牟山)에서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 다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등으로 옮겼다. 제4대부터 제9대 왕까지는 대혼란기로 불과 20여 년 동안에 6명의 왕이 바뀌는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제10대 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국의 황금시대를 맞았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5경 15부 62주로 전국을 나누어 통치하였으며, 그 번영이 당에서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왕이 죽은 후 다시 정치는 혼란을 거듭하여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간의 정치적 분쟁이 계속되었다. 결국은 거란족의 통합을 이룩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926년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부흥을 위한 발해인들의 항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928~986년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속한 정안국(定安國), 1029~1030년 랴오양〔遼陽〕을 중심으로 한 흥료국(興遼國)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멸망 후 무려 200년간이나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 후 발해 유민은 대부분 고려로 들어가 고려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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