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알고가면 더 좋다 ◑/고궁. 사찰

조계산 선암사

by sang-a 2016. 11. 12.

[그 산, 이 절] 조계산 선암사

 

인간이 선계(仙界)로 드는 입구이자 신선이 세상으로 나오는 출구인 곳이 바로 선암사(仙巖寺)입니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지우며, 발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고 신선의 경지를 허락하는 절이 바로 선암사입니다. 이런 표현에 대해 어떤 분들은 넘치는 언사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올라봐도 선암사에 대한 인간의 정서적 반응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적적한 산골 절, 쓸쓸한 숲 아래의 중. 지혜의 물은 맑고도 용하지. 8천 성인에게 예배하고 담담히 사귀니 삼요(三要)의 벗일세. 내 여기 와 뜨거운 번뇌 식히니, 옥으로 만든 병에 담은 얼음 대한 듯하네.”


고려 명종 때의 문장가인 김극기(생몰 미상)가 선암사를 노래한 시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산벚꽃도 지고 함박꽃도 지고, 허공에 가득하던 새 울음소리도 잦아든 때입니다. 새초롬한 봄날은 갔고, 무성한 여름날은 아직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무심히 푸른 계절입니다. 조금 속되게 말하면 밋밋한 계절이어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도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연의 품은 넓고도 깊어서, 곳곳에 보석을 숨겨두고 있습니다. 그 보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암사입니다.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에 걸친 조계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 창건 시기와 창건주에 대한 명확한 문헌 기록은 없습니다. 18세기 초에 작성된 <조계산선암사사적기>에는 도선 국사(827~898)가 창건했다 하고, 19세기에 작성된 <순천부조계산선암사제6창건기>에는 신라 법흥왕 때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 1.임진란과 병자호란, 6·25도 넘긴 선암사 철불. 2.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연못 삼인당.
한편, 절의 구전에 의하면 아도 화상이 529년에 비로암으로 터를 닦았고, 나중에 도선 국사가 머물며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며 선암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대가람을 일으켰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철불 1구, 보탑 2기, 부도 3기, 문수전과 조계문, 뒷간만을 남기고 모두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오랫동안 초목에 묻혀 있다가 현종 원년(1660년)에 중건되었으나 1823년 화재 때 또다시 대부분 잿더미로 바뀌었고, 순조 25년(1825년)에 해봉, 눌암, 익종 세 대사가 일곱번째로 다시 절을 일으켜 오늘에 이릅니다.


 

▲ 1.선암사 명물인 홍교. 저 뒤의 것은 보수 중이다. 2.만개한 불두화. 선암사는 일년 내내 꽃을 볼 수 있는 절이다.
선암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시각이 필요합니다. 첫째, 절 곳곳에 배인 풍수적 고려를 살피는 일입니다. 둘째는 고격을 잃지 않고 있는 우리 건축에 대한 심미안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사람과 자연이 만나 이룰 수 있는 최고 형태의 조화를 읽을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 셋은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나머지 둘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앵무새의 읊조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과 절,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한 몸이라는 성찰의 눈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결코 선암사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꽃을 볼 수 있는 절


간단히 창건 내력에서 본 바와 같이 선암사에는 도선 국사의 자취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우선 비보(裨補) 사찰로서 선암사의 역사성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광양의 운암사, 그리고 진주의 용암사와 더불어 순천 선암사는 이른바 삼암사로, 지리산을 정점으로 순천·광양·진주에서 세 솥발처럼 한반도의 남쪽 중간권역을 비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옛 기록인 13세기 중엽 박전지가 쓴 <용암사중창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옛적에 개국 조사(祖師)인 도선이 지리산의 주(主)인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부터, ‘만일 삼암삼(三岩寺)를 창립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그칠 것’이라는 비밀스런 부촉을 받았다. 이에 세 암자를 창건하였으니 지금의 선암사(仙巖寺), 운암사(雲巖寺), 용암사(龍巖寺)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절이 나라에 큰 비보가 됨은 고금 사람들이 널리 아는 바이다.”(동문선 권68, <영봉산용암사중창기>, 최원석 지음 <우리 땅 풍수기행>에서 재인용)


 

▲ 1.선암사 일주문 야경. 2.선암사 돌확을 넘쳐 흐르는 물이 절로 한 모금 마셔보고픈 염이 일게 한다. 3.선암사 입구에서 합장한 어린 불자들.
빈 구석이나 결함이 있는 곳에 보태고 채운다는 의미의 비보풍수. 좋고 나쁨이라는 상대적 평가에 따라 취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상생의 정신을 구현한 절이 바로 선암사입니다. 또한 선암사는 도선 풍수의 사상적 바탕인 선도(仙道)와 불교의 융합을 보여주는 절입니다. 이름부터가 그러한데, 선암사의 배경을 이루는 조계산 장군봉 아래 배바위라 불리는 너럭바위에 신선이 머물렀다는 데서 비롯됐다 합니다. 도선 국사가 조성했다고 전하는 각황전의 철불, 대웅전 앞의 두 보탑과 세 부도는 달아나는 지세를 붙들어 두기 위한 풍수적 배려라고 합니다.

 


선암사의 크고 작은 전각들은 한국 건축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곱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크고 작음, 혹은 화려함과 소박함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 줍니다. 조각품 같은 돌담과 담쟁이의 조화,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건물 배치, 결코 주변 경관을 압도하지 않는 조형적 고려는 최고의 찬사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가람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전면에 버티고 앉은 성보박물관은 옥의 티를 넘는 흠결로 진한 아쉬움을 안깁니다.


 

▲ 1.초저녁 선암사 대웅전 풍경. 2.팔각지붕의 2층 누각인 강선루. 대각암과 운수암 쪽에서 선암사를 감싸듯 흘러내리는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서 있다.
이러한 선암사의 면모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산의 품에 안겨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하면서도 인간의 섬세한 손길이 만든 수공예적 아름다움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선암사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언제나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른 봄 동백과 매화에 이어 연산홍, 불두화, 백일홍, 상사화가 다투는 법 없이 피었다 지고 난 뒤 깊은 가을 피어나는 차꽃으로 막을 내립니다. 특히 꽃을 피운 이른 봄의 고매(古梅)는 가히 국보급입니다. 그런데 이런 꽃들이 어제 오늘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절에 머물다 간 고인들의 그윽한 시정(詩情)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 덕화로 오늘의 우리는 역사의 향훈까지 덤으로 얻습니다.

 


 


우리 차의 본산은 이제 선암사


여기저기서 귀동냥한 말까지 보태다 보니 말이 번다해졌습니다만, 사실 선암사를 보는 데는 전문가인 양하는 알음알이가 필요 없습니다. 순수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범부의 눈으로 산이 열어 준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마땅히 문화재로 대접받아야 할 선암사 뒷간.
매표소에서부터 선암천을 끼고 강선루에 이르는 초입은 길다란 초록 터널입니다. 포장을 마다한 맨살 같은 길가에는 가지를 맞댄 서어나무와 굴참나무 따위의 활엽수들이 또 다른 하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길과 함께 흐르는 선암천 물소리는 그냥 물소리가 아니고 필시 녹음의 파동일 것입니다. 이제 곧 신선의 세계로 들어서니 속진을 씻으라는 배려일 테지요. 이렇게 몇 구비를 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다는 두 개의 무지개다리가 나타납니다. 위에 있는 것이 보물 제400호인 승선교(昇仙橋)입니다.

 


선계로 오르는 다리를 지났으니 지금부터 우리 모두는 신선이 된 셈일까요. 그렇습니다. 이어서 강선루(降仙樓). 신선이 내려와 우리를 맞아주고 있으니까요.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강선루는 대각암과 운수암 쪽에서 선암사를 감싸듯 흘러내리는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서 있습니다. 강선루를 지나면 삼인당(三印塘). 불교의 근본 교의를 말하는 삼법인(三法印)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도선국사가 조성한 연못이라는데, 절의 지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만든 것이라 합니다.


연못을 지나 오른쪽으로 차밭을 끼고 돌아 급하게 키를 높이면 조계산선암사라는 편액을 단 일주문을 만나게 됩니다. 드디어 태고종의 총본산인 태고총림 선암사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이곳에서부터는 잔잔한 연못의 물고기처럼 도량을 거닐기만 하면 됩니다.


 

▲ 차 잎을 따는 선암사 스님들.
불교와 차(茶)를 뗄 수가 없듯이 선암사와 차의 관계 또한 그러합니다. 마침 햇차를 만드는 때여서 부드럽고 상큼한 그 맛을 누리는 과분한 즐거움도 맛보았습니다. 선암사는 우리 차의 맥을 잇는 절이기도 합니다. 일제를 거치면서 맥이 끊기고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는 일본 다도에 짓눌린 우리 차도를 되살리기 위한 지허 스님(선암사 주지)의 각별한 노력으로 이제 선암사는 우리 차의 본산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허 스님의 차도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누워서만 마시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파격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끽다(喫茶)의 근본은 차를 마시는 행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에게 가장 큰 장애인 혼란스럽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말과 상통한다 하겠습니다.


끝으로 사족 삼아 몇 마디 더 보태겠습니다. 바삐 돌아서야 할 걸음이라 할지라도 선암사에서 꼭 봐야 할 세 가지. 각황전의 철불과 삼성각 앞의 누운 소나무, 그리고 뒷간. 마땅히 문화재 대접을 받아야 할 뒷간에서, 살창 너머로 자연을 감상하며 먹은 것을 되돌려 보니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삶의 길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더군요. 가시는 길이 있거든 일부러라도 한 번 앉아 보십시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부장 / 사진 정복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