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일본보다 200년 앞서 강국 만들려던 소현세자, 부왕 애첩에게 죽어
입력 : 2014.09.22 13:38
1. 애첩에 놀아나 총명한 장남 죽이기 위해 인조는 쿠데타를 했나?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은 쇠약해지는 명국과 강해지는 만주족의 후금 사이에서 유연한 외교로 능숙하게 대처해 온 15대 왕 광해군을 내쫓고 정권 탈취에 성공했다. 그런 후 그들은 망해가는 명국만을 붙들고 완고한 사대외교를 하다가 자기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만주족 황제(청 태종) 앞에 왕(인조)이 삼전도(서울 송파구) 얼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큰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항복을 하였다. 항복 후 약 50 만의 백성들이 노예로 만주로 끌려가는 것은 물론 왕세자 부부와 둘째 왕자 부부도 볼모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볼모생활을 하다 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귀국 후 불과 3개월도 못 되어 급사했다. 그 죽음은 세자의 부왕 인조와 애첩 조귀인의 작품이었다. 인조반정은 만주족에 굴욕적인 항복,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의 살해, 그리고 수십만 백성들이 전쟁 포로 노예로 잡혀가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인조반정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던 비극의 쿠데타 사건이었다.
반정(쿠데타)으로 조선 16대 왕이 된 인조의 부친 정원군은 14대 왕 선조 후궁의 아들로 성격이 포악 및 방탕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백모를 납치하는 불륜까지 저지른 패륜아였다. 광해군은 정원군과 이복형제였다. 선조 사후 왕이 된 광해군은 시정잡배나 강도보다 더 악명 높은 패륜아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이 반정을 계획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능양군은 자신에 대한 광해군 정부의 감시 공백을 이용하여 권력을 탐내기 시작했고 동생 능창군이 광해군 정부에 사형을 당해 그에 대한 원수도 갚고 싶었다. 즉 능양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을 위해 반정을 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욕과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한 것이었다. 능양군은 반정에 성공하여 왕(인조)이 되었지만 명분 없는 반정과 부친의 악행과 패륜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해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다. 명분 없이 반정의 주역을 한 그는 실익 없는 명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취하다 급기야 조청전쟁(병자호란)을 당하고 그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와 항복을 하여 더욱 더 심한 열등감과 컴플렉스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조청전쟁(병자호란)에서 항복 후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이 볼모로 만주 심양에 끌려갈 때 소현세자는 26세였다. 봉림대군은 19살로 넓은 세상을 제대로 보기에는 어렸다. 20대 후반의 소현세자는 심양관에서 청나라 관리들과 조선에 관한 업무협의 등을 하면서 청국이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선진 문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조선도 서양과 청국의 새로운 문물을 배워야 힘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국에서 국제 외교에 능숙했고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글로벌 패러다임으로 전환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개방적 성향은 청국에 이를 갈면서 복수심에 불타 있는 부왕 인조에게 의심과 미움을 사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청국에서 소현세자는 청국 고위층과 좋은 유대관계를 형성했고 조선인 전쟁 노예들 속환에 많은 노력을 하여 백성들의 인기가 날로 높아 갔다. 그가 1645년 2월 34세의 나이로 선각자가 되어 그리던 고국 조선에 돌아 올 때 백성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그러나 부왕 인조의 태도는 쌀쌀하기 그지 없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나 백성들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한 인조는 왕권 유지에 항상 의심이 많았다. 그는 세자가 청국 세력과 백성의 지지를 업고 자기 대신 왕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의심에 쌓여 있었다. 이러한 왕의 심중을 잘 알고 있는 왕의 애첩 조귀인은 왕의 아픈 마음을 건드리면서 아양과 교태를 부렸다. “전하! 세자가 앞으로 성군이 될 것이라고 백성들 칭송이 자자합니다. 청국도 세자가 빨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전하! 훌륭한 장남을 두셔서 호호호!” 조귀인의 이런 간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인조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고 세자의 꼴도 보기 싫었다. 소현세자는 효자였으나 조귀인은 왕의 의심을 계속 부추겨 끝내 총명한 세자를 버리고 말았다. 5. 인조 애첩 조귀인이 효자 소현세자 죽이고 인조는 장손과 며느리 죽여 소현세자는 귀국 후 2달 정도 되어 학질이 걸렸는데 당시에도 약물치료가 가능해 학질로 죽는 경우가 드물었다. 소현세자의 주치의는 인조의 애첩 조귀인의 소개로 대궐에 들어온 지 3개월 밖에 안 된 이형익이 되었다. 건강했던 세자였는데 이형익의 침을 맞다가 발병 3일 만에 급사했다. 이 사건의 배후는 여러 사정으로 보아 자기 아들(이징, 승선군)을 왕으로 만들 비밀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악녀 조귀인이었고 인조도 조귀인의 짓인 줄 알고 있었다. 이형익을 국문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간청에도 인조는 치료 중 사망하는 일은 다반사이므로 국문과 처벌을 할 필요가 없다고 냉정하게 일축해 버렸다. 그리고 망자가 된 세자를 박대하여 장례식도 아주 간소하게 하였다. 인조는 장남이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아들에게 침을 놓아 죽게 한 이형익을 매우 신임해 신분을 파격적으로 높여 현령이라는 지방수령도 시켜주었다. 소현세자 사후 인조는 자신에게 장손인 소현세자의 장남을 죽이고 며느리 강빈도 누명을 씌워 죽였다. 정말 소름이 끼치는 잔인한 아버지고 할아버지였다.
부왕 인조에게 죽은 바나 다름없는 소현세자는 총명함은 물론 포용력도 크고 세상 변화를 통찰하는 혜안을 가진 선각자였다. 그는 귀국 전 1644년 후반 북경에서 약 70일간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 교류하면서 유럽에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열강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서양과학을 배우고 싶어 했고 천주학을 읽었다. 소현세자는 “천주학을 읽고 수양과 덕성의 함양에 적합한 교리가 그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천주님 상을 볼 때 마음의 평화가 오고 속세의 먼지와 때가 씻어 진다”고 아담 샬에게 편지한 것으로 보아 성령 감동을 받은 신자가 된 것이 분명하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라는 주장도 있으나 그들은 천주학 서적을 소지하였고 선교사들을 만났다고만 하지 성령에 감동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성령 감동을 받아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면 신자라고 볼 수 없다.
귀국 전부터 소현세자의 눈에는 망해가는 명국에 대한 사대사상에 푹 빠져 있는 조선의 현실과 미래가 암담하게 보였다. 특히 서양과학과 천주학 책을 읽은 뒤로는 조선이 숭배하는 성리학으로는 더 이상 조선을 중흥시킬 힘이 없고 서양과학과 문물로서 조선을 중흥시켜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귀국 시 아담 샬로부터 서양과학 서적들을 받고 조선에 돌아가 인쇄하여 보급할 계획이라고 하였고 천주상도 받았다. 그는 천주교 포교에 필요한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하겠다고 하여 아담 샬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당시 청국에도 신부가 부족해 아담 샬은 신부 대신 중국인 천주교 신자 5명을 추천하여 소현세자는 이들 5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이로 보아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으면 조선에 천주교를 포교하고 서양의 과학 문물을 보급하고 장려하여 조선을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꾸어 일본보다 200년 앞서 개화를 하고 중흥을 해 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8. 소현세자의 조선 중흥 계획은 서인 세력을 제압하고 성공할 수 있어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조선을 글로벌 국가로 개방하고 개혁한다면 사대부들과 유림 등 보수 세력의 저항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남인의 일부에서도 청국으로부터 천주학과 서양과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남인 세력과 손을 잡으면 명국 사대주의의 서인 세력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지지가 하늘 높이 오를 것이라 감히 사대부와 유림세력도 어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아담 샬 신부가 속한 예수회를 통하여 동아시아로 가톨릭 전도에 열중하고 있는 유럽 여러 나라들의 도움을 받아 조일전쟁과 조청전쟁의 전란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군대를 일부라도 서양식으로 근대화하여 왕의 직할 부대로 하면 얼마든지 사대부 세력과 유림세력을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청국과도 우호적인 관계이며 외교에 능한 소현세자의 이러한 계획은 국제적 마찰 없이 무난히 성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선각자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 붕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아래에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을 경우를 가정해 조선의 개혁과 중흥과정을 그렸다. 소현세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혜안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이 있고 없음이 바로 국가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혼란시기와 한국전쟁 시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한반도에 지금 자유 대한민국은 없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 있을지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한국이 현재 일인당 GDP 25,000 달러와 세계 7-8위의 무역 경제 대국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므로 대통령 선거에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고 정말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생각하여 국가의 백년대계를 이끌어갈 통찰력과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대통령을 선출해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을 것이다. 이제 보수와 진보 모두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소현세자의 부왕 인조와 같이 인재를 버리면 안 되고 혜안과 통찰력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 양성 교육에 합심해야 한다. 이것은 국가는 물론 기업조직을 비롯한 모든 조직에 해당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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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남박씨족보 원문보기▶ 글쓴이 : 박창서[昌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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