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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가면 더 좋다 ◑/산

봉화 대명산 구곡

by sang-a 2018. 11. 30.


대명산구곡 중 5곡인 ‘청량산’ 입구 낙동강 풍경. 오른쪽 산이 청량산이다. 강필효는 이황이 ‘오가산’이라 불렀던 이곳 청량산에서 이황을 떠올리며 도심(道心)을 노래했다.

 

대명산구곡(大明山九曲)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해은(海隱) 강필효(1764~1848)가 설정한 구곡이다.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의 보라골에서 시작해 운곡천을 거쳐 명호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 뒤 청량산을 지나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까지 이어지는 20㎞ 정도의 물줄기에 걸쳐 있다. 대명산구곡은 상류에서부터 1곡이 시작된다. 1곡 마고(麻姑), 2곡 갈천(葛川), 3곡 조대(釣臺), 4곡 백룡담(白龍潭), 5곡 청량산(淸凉山), 6곡 광평(廣平), 7곡 고산(孤山), 8곡 월명담(月明潭), 9곡 면만우(萬隅)다. 강필효는 호가 해은(海隱)이고, 봉화 법전 출신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돼 1803년에 순릉참봉(順陵參奉), 1814년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1842년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곧 충청도도사로 옮겼다. 이듬해 통정대부에 승진하고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고성현고경록(古聖賢考經錄)’ ‘근사속록(近思續錄)’ 등이 있다. 문집 ‘해은유고’가 있다.

◆강필효가 명나라를 사모하며 설정한 구곡

강필효는 주자(朱子)를 존숭했다. 그는 주자를 존숭하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봉화에 은거하며 대명산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 구곡의 이름인 대명산은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강필효의 대명산구곡가 서시다.

‘해동이 저 멀리 성황(聖皇)의 신령에 닿으니/ 크지 않은 산과 내가 대명(大明)을 숭상하네/ 그 속에 고사리 캐며 사는 선비 있으니/ 천지 가에 살며 호탕한 노래 부르네.’

강필효에게 대명산구곡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냈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이어가는 공간이었다. ‘성황의 신령’은 명나라 황제의 신령을 말한다. 조선 외진 산골의 산과 냇물도 명을 숭상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 산속에서 고사리 캐며 절의를 지키는 선비는 다름 아닌 강필효 자신이다.

서시 끝에 붙인 주석에 강필효는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뻗어 내려온 지맥이 이곳으로 흘러 왔음을 설명한다.

‘대명산이 태백에서 뻗어 나와 용이 날고 봉황이 춤을 추는 듯이 100리를 오르내리다가 우뚝 솟아 높은 산이 되니, 산 아래 은빛의 폭포가 뿜어내는 물이 산을 에워싼다. 돌아보니 이제 제경(帝京)은 전쟁이 일어나 조종(朝宗)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한 구역만 숭정(崇禎)의 일월(日月)을 이어가고, 이 산이 또 대명(大明)의 이름을 가지니 어찌 한 조각 깨끗한 땅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 후기 유학자 해은 강필효
임란때 원군 보낸 明 사모하며
봉화∼안동 20㎞ 물길에 설정

1곡, 낙동강 상류 보라골 위치
할머니 피란지 인연 첫 굽이로

5곡 詩 주석 달아 백운암 언급
퇴계 이황 道心에 경외감 표현



1곡 마고는 낙동강 상류의 봉화군 명호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4㎞ 정도 떨어진 도천리 ‘보라골’에 있다. 밖에서 보면 안에 사람 살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작은 산골마을이다. 상보라, 중보라, 하보라 등에 모두 50가구쯤이 살아간다. 강필효의 할머니는 난을 피해 이곳에서 살았던 인연이 있었다. 풍광이 빼어난 곳은 아니지만 큰길에서는 이 계곡이 잘 드러나지 않고 물이 넉넉한 데다 농토도 적당히 있어 난을 피하기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개인적인 인연으로 강필효는 이곳을 대명산구곡의 첫 굽이로 삼았다.

2곡 갈천은 명호면 도천리에 위치한다. 마고동천(麻高洞天)을 떠돌던 시냇물은 하류로 흘러 산속을 돌고 돌아 1.5㎞ 정도 내려가면 보라교에 이르러 도천과 만난다. 이 물길은 650m 정도 더 내려가 제법 큰 물줄기인 운곡천(雲谷川)으로 흘러든다. 이 합수 지점 삼거리 근처가 바로 제2곡인 갈천이다.

3곡은 조대. 운곡천 물줄기는 갈천을 지나 1.5㎞를 흘러 명호면소재지를 길게 휘감고 돌면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다. 운곡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도천교에서 오른쪽 물가에 눈길을 주면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큼직한 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어 낚싯대 드리우기도 좋은 곳이다. 낙동강에 안동댐이 들어서기 전인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은어떼가 있어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조대가 바로 이곳이다.

4곡 백룡담은 명호면 관창리에 있다. 조대를 지난 낙동강 물줄기는 바위 병풍을 휘돌며 흘러간다. 강물의 수량도 점점 많아진다. 조대에서 6㎞ 정도 내려오면 관창2교 직전 왼쪽으로 거뭇한 바위 벼랑이 눈길을 끈다. 그 아래 못을 이루고 있는 강물이 바로 용이 살았다고 전해오는 백룡담이다.

강필효는 이 부근을 이렇게 설명한다. ‘백룡담은 조대 아래에 있다. 양쪽 언덕의 산이 모두 층층의 바위로 되어 있어 강물이 깊고 푸른데, 그 안에 용이 살고 있다. 일찍이 용이 비늘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5곡은 이황의 ‘오가산(吾家山)’인 청량산

5곡 청량산이다. 백룡담을 뒤로하고 낙동강 물길을 따라 3㎞ 남짓 내려가면 청량산 입구가 나온다. 이곳을 다섯째 굽이로 삼았다. 강필효는 이곳에서 청량산을 우러르며 퇴계 이황을 떠올렸다. 오가산(吾家山)은 퇴계가 청량산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오곡이라 청량산은 땅이 더욱 깊으니(五曲淸凉境益深)/ 나열한 봉우리들 숲과 같은 형세이네(群峰羅列勢如林)/ 오가산 아래에 백운 마을이 자리하니(吾家山下白雲塢)/ 오랜 세월 거듭 찾아가 도심을 공부하리라(百載重尋講道心)’

강필효는 5곡 시 뒤에 주석을 달아 ‘당나라 이발이 광려에 은거하며 이가산(李家山)이라 이름하였는데, 퇴계 선생이 청량산을 또한 오가산이라 일컬었다. 산에 백운암이 있는데 곧 선생이 독서하던 곳이다. 오래도록 폐허가 되었는데 몇 해 전에 비로소 새로 지었다’라고 설명했다.

백운은 퇴계가 머물던 백운암을 일컫는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청량산의 백운암을 찾아 퇴계가 전해 준 도심(道心)을 공부했다. 퇴계가 전해준 도심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향기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전해온다는 경외감을 표현하고 있다.

6곡 광평은 명호면 관창리에 위치한다. 5곡 청량산에서 1.3㎞ 정도 내려오면 낙동강 우측에 나오는 마을이다. 넓고 평평한 지형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7곡 고산은 광평에서 2㎞ 정도 내려가면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이른다. 마을 쪽에 있는 작은 산이 고산이다. 그 건너편 강변에 금난수(1530~1604)가 은거하던 고산정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낙동강이 산을 빙 돌아 흘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천둥이 크게 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산을 두 동강냈다고 한다. 그래서 산과 산 사이로 강물이 흐르게 되고, 고산정 맞은편에 따로 고산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7곡 고산은 도산구곡의 8곡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산구곡의 마지막 9곡 청량도 대명산구곡의 5곡에 해당하므로, 대명산구곡은 도산구곡과 많이 겹치는 셈이다.

8곡 월명담은 고산에서 1㎞ 정도 내려가면 강물이 크게 굽이 도는 지점이다. 월명소(月明沼)·월명당(月明塘)이라고도 불렀다.

9곡 면만우는 월명담에서 강물을 따라 1.5㎞ 정도 내려가면 나오는 굽이다. 도산면 가송리에 속한다. 이곳에 학소대가 높이 솟아 있다. 강필효는 이 굽이를 9곡으로 설정했다. 더 나아가면 퇴계 선생의 은거지인 도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강필효는 “월담 아래에 면만우라는 곳이 있는데 산이 깊고 물이 돌아 흘러 그윽하고 빼어나서 은거할 만하다. 이곳을 지나면 도산의 형승(形勝)이 있다”고 설명을 달았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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