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알고가면 더 좋다 ◑/산

그림같은 소나무숲길, 그 아래 켜켜이 쌓인 고난의 무늬

by sang-a 2017. 4. 18.

그림 같은 소나무숲길, 그 아래 켜켜이 쌓인 고난의 무늬

강화대교 지나 읍내 방향으로 간다. 삼거리에 있는 서문에서 길을 건넌다. 성곽 안쪽에 네모난 돌이 서 있다. '연무당 옛터'라고 새겼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잔디밭 터만 남았다. 흔히 불평등조약이라 한다. 일제 침략이 여기서 비롯됐다 한다. 설명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 강화도=이한수 기자   편집=뉴스콘텐츠팀
  • 입력 : 2017.04.13 04:00


    강화도조약 현장

    이 섬은 켜켜이 쌓인 지층(地層)이다. 어떻게 자르든 아픈 역사의 무늬가 나타난다. 이번엔 1876년에서 베어내기로 한다. 이해 2월 26일(이하 양력)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규)이 체결됐다.

    강화대교 지나 읍내 방향으로 간다. 삼거리에 있는 서문에서 길을 건넌다. 성곽 안쪽에 네모난 돌이 서 있다. '연무당 옛터'라고 새겼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잔디밭 터만 남았다. 흔히 불평등조약이라 한다. 일제 침략이 여기서 비롯됐다 한다. 설명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강화도성 서문 성곽 언덕 위에서 바라본다. 서문 이름은 첨화루(瞻華樓). ‘아름다움을 본다’는 뜻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길 건너 가운데 빈터에 놓인 비석에는 ‘연무당 옛터’라고 새겨져 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강화도성 서문 성곽 언덕 위에서 바라본다. 서문 이름은 첨화루(瞻華樓). ‘아름다움을 본다’는 뜻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길 건너 가운데 빈터에 놓인 비석에는 ‘연무당 옛터’라고 새겨져 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는 다른 시각으로 본다. 회담은 "거의 맨손으로 일본 함대를 막은 것"이란 평가다. 최근 장편소설 '강화도'를 냈다. 주인공은 조선 측 대표 신헌(申櫶·1811~1884). 힘없는 나라를 두 어깨에 짊어진 분투가 눈물겹다. 신헌은 회담 전후인 1월 30일부터 3월 1일까지의 상세한 기록 '심행일기'를 남겼다.

    일본 측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1840 ~1900)는 함선 6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무단 상륙했다. 4000명 병력(실제 809명)이 왔다고 협박했다. 덴노(天皇) 즉위 축하 예포라며 함선에서 대포 90여 발을 잇달아 쐈다. 조선 수군이 5개월 전인 1875년 9월 강화도에 무단 침입한 일본 군함 운요호를 포격한 일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로 쳐들어간다고 겁박했다.

    신헌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우호를 다지자면서 빈번히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말을 입에 올리고 있으니 이것이 서로 교제하자는 뜻인가. 다른 나라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에서 금하는 바를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상륙한다면 그 허물은 누구의 것인가."


    이미지 크게보기
    (위부터) 갑곶돈대, 손돌목돈대, 초지진

    일본 함대는 제물포 앞바다를 지나 강화도와 육지 사이 좁은 해협으로 진입했다. 5년 전(1871년·신미양요) 미국 아시아함대 군함 2척이 침입한 곳이다. 또 앞서 5년 전(1866년·병인양요)에는 프랑스 함대가 침략했다. 조선 정부는 이 해협에 포대·돈대·진 50여 개를 설치했다. 정책 제안자는 신헌이었다.

    강화대교 아래 남쪽 방향으로 간다. 갑곳돈대가 있다.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10년 후엔 일본이 무단 상륙했다. 조선 대신(大臣)을 불러오라고 생떼를 부렸다. "왜인 24명이 갑곶진에 상륙한 후 대신과의 접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심행일기' 2월 5일) "왜인 120명이 각각 총을 소지하고 칼을 찬 복장으로 갑곶진에 상륙한 후 곧장 강화부 안에 들어왔다."(2월 7일)

    갑곶돈대에 강화전쟁박물관이 있다.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기'가 전시돼 있다. 미군은 전리품으로 가져간 이 기를 136년 만인 2007년 반환했다. 가로·세로 각각 4m가 넘는 대형 깃발이다. 어재연 장군은 1871년 6월 갑곶돈대 남쪽 광성보를 지키다 순국했다. 광성보에서 이어진 오른쪽(남쪽) 솔숲길이 아름답다. 언덕 위에 손돌목돈대, 바닷가에 용두돈대가 있다. 소나무 숲길과 바다 풍경이 그림 같다. 역사공부 나온 초등학생들, 젊은 연인이 손잡고 걸어갔다. 141년 전 일본 함대는 용두돈대 앞바다인 손돌목을 오르내리며 위협했다. '심행일기'에는 "이양종선 세 척이 손돌목을 넘어서 올라갔다 하옵고…"(2월 16일) 같은 보고가 여럿 있다.

    다시 남쪽으로 간다. 초지진이다. 육지와 섬을 잇는 초지대교가 있어 서울에서도 가깝다. 수령 400년 소나무에는 운요호 사건 때 포격전에서 입은 상처 자국이 남아 있다. 일본 함대는 이곳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심행일기'에는 초지진 관련 기록이 29회 나온다.

    신헌은 일본의 본격 침입을 늦추는 완충 역할을 했다고 송호근 교수는 평가한다. 고종은 조약 직후 신헌에게 "말을 잘했다. 이번의 노고를 내가 알고 있다"고 치하했다. 신헌은 정색하고 임금에게 아뢴다. "병지(兵志)에 '공격하기엔 부족하나 지키기에는 여유가 있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삼천리 강토를 가지고 있는데 어찌 지켜낼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이른바 하지 않는 것[不爲]이지, 할 수 없는 것[不能]이 아닙니다."('고종실록' 13 년2월 6일·양력 3월 1일)

    강화도조약은 일본에 페리 제독이 내항한 후 23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까지 거의 30년간 '지켜낼 좋은 방도'를 짜내야 했다. 신헌이 다시 와서 물을 듯하다. 지금 역시 '불위(不爲)'이지, '불능(不能)'이 아니라고.



    ■ 갑곳돈대·광성보·초지진 등 강화도 역사유적은 각각 700~1100원 입장료가 있다. 각 유적지에서 3~4개를 묶어 구입하면 15%, 5개 이상은 20% 싼값에 판다. 강화대교→연무당 옛터→갑곳돈대(강화전쟁박물관)→광성보→초지진→초지대교 여정이 자연스럽다.

    12일 시작한 고려산 진달래 축제가 23일까지 이어진다. 축제 직전인 지난 10일 정상에 올랐을 때 진달래는 거의 피지 않은 상태. 주말에 꽤 피기 시작해 다음 주 절정을 이룰 것이다. 축제 기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매우 혼잡하다.

    우리옥(032-934-2427): 1953년 개업했다. 백반을 저렴한 값 5000원에 낸다. 불고기, 병어찌개, 간장게장 등을 각각 1만~2만원에 추가 주문한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관련

    '◐ 알고가면 더 좋다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안 용담댐 벼롯길  (0) 2018.09.30
    자하문(창의문)고개와 부암동 세검정의 유래  (0) 2017.06.01
    백수 해안도로 해당화  (0) 2017.03.14
    매봉산 바람의 언덕  (0) 2016.08.28
    섬진강 토지길  (0) 201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