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 자하문(창의문) 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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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자하문고개 혹은 창의문고개라 하였다.
고개 마루턱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므로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으로서 도성의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있다.
창의문을 속칭 자하문이라 한 것은 창의문이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해서 생긴 속칭이다.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다.
또 성밖 신영동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의 이름에 연유하여 일명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의 하나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의 서쪽 날개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태조 5년(1396) 서울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설될 때 함께 건립되었다. 그 런데 창의문은 건립된지 18년 만에 한때 폐쇄되기도 하였다. 즉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하여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두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으므로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는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로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또한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동소문과 서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므로 두 문을 폐쇄하여도 별반 지장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후 세종 28년(1446)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통제가 완화되어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외에는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간, 측면 2간,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虹霓: 석조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틀) 또한 아담하다.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다락에는 나무로 만든 큰 닭을 걸어 놓았는데, 그 까닭은 문 밖의 지세(地勢)가 지네와 흡사하기 때문에 그 기세를 제압하기 위하여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양을 만들어 걸어놓았다 한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李貴)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金),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李曙軍)과 이천의 이중로군(李重老軍)은 홍제원에서 김유군(金軍)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1970년까지만 해도 창의문에서 세검정으로 가는 길 가 동쪽 부암동 134번지에 높이 2m 쯤 되는 부침바위(付岩)가 있었다. 부암동 동명은 이 부침바위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부침바위의 표면은 마치 벌집 모양 송송 뚫어진 것처럼 오목오목하게 패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수대로 문지르다가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착 붙으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서 여인들이 돌을 붙이려 애쓴 흔적이 벌집처럼 보이게 되었고 바위의 이름도 유래되었다.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바위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여인들이 바위에 돌을 붙여놓고 정성스럽게 절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부침바위에 대한 유래는 고려 중엽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많은 장정들이 원나라에 끌려갔는데, 그 중에는 신혼초야를 지낸 신랑도 섞여 있었다 한다.
혼인 하룻만에 생이별을 한 신부는 매일 소복을 하고 부침바위에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된 왕이 원나라 조정에 그 뜻을 전하여 마침내 신랑이 돌아와 부부가 상봉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소복을 하고 매일 같이 기도를 하며 빌 때는 바위에 붙인 돌이 떨어졌는데,
부부가 상봉한 후에는 붙인 돌이 그대로 있다 하여 부침바위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부터 아들 낳기를 바라거나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려는 부모들이 이 바위에 돌을 붙이고 빌었다 한다.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정교 화려한 정자와 건물이 어울려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꼽히는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다.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자를 새겨 놓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별장을 차지하면서 앞산이 바위산이었으므로 대원군이 아호를 석파(石坡)라 하고 정자이름을 석파정(石坡亭)이라 하였다.
경내에는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등 7동의 주요 건물이 남아 있으며, 뜰에는 오래 된 소나무들이 차일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채는 1958년 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겨져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석파정의 원래 소유자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김흥근이었다. 아버지 김명순(金明淳)이 순조의 장인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과 사촌간이며, 일찍이 벼슬에 올라 예조판서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성격이 격하고 방자한 면이 있어 한 때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당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집권의 야욕을 보이자 조의석상(朝議席上)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함으로서 대원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원군이 집권한 후 많은 토지를 빼앗겼다.
특히 그가 소유했던 석파정은 장안에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대원군이 팔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팔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이 한가지 꾀를 내어 그에게 하룻동안 석파정을 빌려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받았는데, 대원군은 그의 아들 고종을 대동하고 다녀 갔다.
국법에 임금이 와서 묵고 간 곳에는 신하가 감히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석파정은 대원군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석파정은 세습되어 이희(李喜)·이준(李埈)·이우(李)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후 천주교 주관의 콜롬비아고아원에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개인 소유이다.
지금 청운초등학교 뒤쪽 일대의 청풍계는 인조 때의 문신 김상용(金尙容)이 청풍각(淸風閣)·태고정(太古亭) 등을 짓고 거주하던 곳으로, 많은 명사들이 찾아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후에도 청풍계의 건물들은 잘 보존되었으며, 조선후기에 그 집안인 안동김씨가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임금이 때로 태고정 등을 찾음으로서 청풍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왕산의 동쪽 기슭, 자하문고개 아래에 위치한 백운동은 산이 그렇게 높지 않고 골짜기가 그렇게 깊지 않지만 작고 큰 산자락들이 둘러 앉고 푸른 소나무숲 사이 작은 길에는 덩굴나무들이 엉켜 있었으며, 그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아침 저녁으로는 흰구름이 덮여 있었으니 도성에서 가까운 명승지로서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을 벗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세검동은 현재 법정동명도 행정동명도 아니지만 신영동은 물론 자하문고개를 넘어서부터 홍지문안 북한산과 백악 뒤의 여러 골짜기 일대가 대개 세검동으로 불리어 왔다. 이러한 깊고 넓은 계곡, 그 중에서도 수석과 좌우 산림풍경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은 것이 세검정이었다.
예전 세검정 주위는 동령폭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바위 위로 소리내어 흘러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여름 장마철이 되면 많은 물이 모여서 부근 계곡에 넘쳐 흘러 일대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도성안 사람들이 많이 나가 넘쳐 흐르는 물결을 구경하였는데, 이를 연중행사로 삼았다 한다.
또 정자 앞에는 넓은 바위들이 깔려 있고 그 바위들은 물에 갈려서 깨끗하고 매끄럽기가 비단폭 같았으므로 평상시에는 근처의 학동들이 붓과 먹을 들고 나가 글씨를 연습하여 먹물 흔적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한다.
세검정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먼저 인조반정 때의 이야기로서,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이괄을 비롯한 이귀·김자점·김유 등이 자하문 밖 이 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서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의 이름을 세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숙종 45년(1719)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고 평창(平倉) 등 시설을 그 부근에 두었으며, 영조 때에는 군문(軍門)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설치하고 종래 북한산성의 업무를 관장하던 경리청(經理廳)도 총융청과 합하니 이 곳은 국방의 요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는 또 탕춘대의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고치고 왕이 때때로 거둥하여 장병들의 무예를 시험하기도 했으며, 300여간의 연융대 청사를 새로 지었다. 신영동(新營洞)의 동명은 새 군영(軍營)이 들어섰다 하여 붙여졌다.
이렇게 군사시설이 증대되면서 연융대 앞 시냇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정자를 지으니 장병과 관민들이 수시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정자 이름을 세검(洗劒)이라 한 것은 장소가 군영 앞이요, 또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공하였던 사실을 기념하면서 ‘칼을 씻어 칼집에 거둔다.’ 곧 평화를 구가한다는 뜻이었다 한다.
세검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주초석(柱礎石)만 남아 있
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된 정자는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정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암반 위에 4각 장초석(長礎石)을 세우 고마루를 꾸몄으며 5평 반 가량의 규모로 기둥머리에는 익공계(翼工系) 양식의 간결한 수법으로 결구(結構)하였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세검동 일대는 산이 높고 물이 맑아 경치는 좋으나 논밭이 없고 다른 생산이 없어서 주민들이 생활고를 못이겨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한성시전(漢城市廛)에서 매매되는 포목의 마전(麻廛)과 각 관청에서 쓰는 메주와 종이 제조의 권리를 이 곳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활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제야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면서 이 곳에 알맞는 여러 과목(果木)을 심어서 능금·자두밭으로 개발하여 생활의 자립을 확립하였다 한다. 세검동 일대는 봄에는 온갖 꽃의 아름다운 빛, 여름에는 싱싱한 과실, 가을에는 불타는 듯한 단풍, 다듬은 듯한 반석(盤石), 옥같이 맑은 시냇물이 온 골짜기를 장식하였다. 특히 세검동 일대는 능금과 자두의 명산지를 이루었다.
한편 자하문고개에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 위해 최후로 이를 검문하다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장 고 최규식경무관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1년 9월 9일 출생, 1968년 1월 21일 순직. 그는 용감한 정의인으로 종로경찰서에 재직 중 청와대를 습격하여 오는 공산유격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도 전사하므로 정부는 경무관의 계급과 태극무공훈장을 내렸다. 비록 한 때의 비극 속에서 육신의 생명은 짧았으나 의를 위하는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라.
그리고 당시 최경무관과 함께 순직한 고 정종수경사의 순직비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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