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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 예술 ◑

시인은 늘 시만 생각하는 사람

by sang-a 2007. 3. 2.
 
시인은 늘 시만 생각하는 사람 - 이문재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죄인입니까?" 스승이 말했다.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이 죄인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그 죄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는 파격적 견해다. 바꾸어 말하면,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죄를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 역시 죄인이라는 일갈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생각'의 위력을 깨우쳐 주고 싶었으리라. 한 생각 바꾸면 내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화한다. 문제는 늘 내 안의 한 생각이다! 인도의 성자 라마 크리슈나의 말이다.

몇년 전, 조셉 켐벨의 신화학을 쉽게 풀어 쓴 책에서 저 구절을 접하고 난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름대로 번역해서 써먹곤 했다. 편집자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늘 책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답했고, 기자는 누구냐는 질문이 들어오면 늘 기사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대꾸했다. 어쩌다 시창작 특강을 할 때도, 시인이란 늘 시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말문을 열곤 했다.

하지만 말이 쉽지, 항상 시만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시인은 시를 쓸 때만, 시를 구상할 때에만 시인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이 무한 경쟁 시대에 시에 대한 생각은 돈에 대한 생각(김수영이 그랬듯이)이 압도해 버릴 때가 많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해서, 시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면, 그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시를 생각한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이다. 온몸과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우주와 호흡하는 상태. 몸과 마음의 경계인 감각을 렌즈로 삼아, 생명 있는 것들과 생명 없는 것들의 맥락과 징후를 새롭게 읽어내는 열외의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늘 시만 생각하기 위해서는 수도자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극한 인위가 필요하다. 8년 전인가, 일본 나가노 현에 살고 있는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소설 『물의 가족』 『천년 동안에』, 수필 『소설가의 각오』 등으로 국내에도 열성 팬이 제법 있는 작가인데, 탐미적이면서도 강인한 문학 세계 뿐만 아니라, 자기 관리가 엄격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서북쪽으로 네 시간을 달려 시나노 오오마치에 닿았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겐지의 집은 논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집 뒤로 해발 3천m가 넘는 북알프스 산맥의 능선이 늠름했다. 오직 원고료 수입으로만 살고 있는 일본 '순문학'의 대표주자. 아이를 낳으면,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것 같아, 부인과 단 둘이 지낸다. 문학을 위해, 세속적 삶의 조건들을 거의 다 포기했다. 하루 일과도 규칙적이다.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체력을 관리한다. 체중이 늘고, 머리도 둔해지기 때문에 저녁은 먹지 않는다. 술과 담배는 물론 하지 않는다. 도쿄 문단이나 중앙 언론과도 끊고 산다. 수도승과 다를 바 없었다.

마루야마 겐지는 늘 삭발을 하고 있어서 수도승 이미지가 더 강조돼 보였다. 왜 삭발을 했느냐고 물었다. 겐지는 이렇게 답했다. "쉰 살 생일 아침에 문득 거울을 보니, 문학에 대한 각오가 자꾸 느슨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면도칼로 머리카락을 밀며 마음을 다잡는다." 겐지야 말로 진정한 소설가였다. 늘 소설만 생각하기 위해,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밀어낸다. 수염처럼 자라나는 삿된 마음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겐지는 "소설은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몸이 곧 자신의 펜이다. 한때 오프 로드 오토바이를 즐기기도 했던 그는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확보하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의 빼어난 문장과 상상력은 바로 저 삭발한 머리와 깨끗한 몸에서 나왔다. 시나노 오오마치를 떠나면서, 나는 술과 담배로 찌든 내 몸이 생산해 낸 시들에게 송구스러웠다.

내 몸의 상태가 단정해져야 한다. 우주 앞에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내 삶의 모양이 보다 단순해져야 한다. 순정해진 몸과 마음이 인간과 우주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 밖에서 오는 우연한 영감은 없을지 모른다. 문학적 감수성이란 결국 몸의 감수성일 것이다. 그동안 외면하고 무시해왔던 '지극한 인위'가 절실해지는 봄날이다.



* 이문재 : 시인, 시사저널 편집위원. 1959년생. 시집 『샘물이 바다로』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