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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발해의 도읍지

by sang-a 2007. 3. 15.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한반도 북부에 있던 나라(698∼9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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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 발해말갈전과 《신당서()》 발해전에 전하는데, 《구당서()》에는 대조영을 고구려 별종이라고, 《신당서()》에는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한다.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도독() 조홰()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대조영은 고구려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오는 당군을 천문령()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 부근의 동모산(:육정산) 기슭에 진국(:)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오동산성()과 성산자산성()이 바로 그 유적지이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거란·해()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이라는 관작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었다는 《구당서》의 기록과, 속말말갈인()이었다는 《신당서》의 기록이 병존한다. 종래 이 때문에 이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편, 한국측의 기록인 《신라고기()》, 《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라고 표기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대조영이 죽은 뒤 대무예()가 2대 무왕()에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인안()이라 정하고,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였다. 발해의 세력이 강해지자, 흑수말갈()이 발해와의 화친관계를 깨고 당나라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문제를 둘러싼 외교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등주(:산동성 봉래)를 급습하였다.

당은 유주(:북경)에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여 남동쪽에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가 3대 문왕()에 즉위하여 대흥()·보력()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1∼2대 왕을 거치면서 국가기반이 확립되자, 문왕은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먼저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정당성·중대성·선조성) 6부(충·인·의·예·지·신부)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주()·현()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문왕은 750년대 전반경에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로 옮겼다. 그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용원부(: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북방면의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정비를 통하여 국력이 향상되자, 762년 당은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작인 발해국공()을 수여하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성왕()·강왕()·정왕()·희왕()·간왕()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별다른 치적은 없다. 간왕에 이어 그의 종부()이며 대조영 동생인 대야발()의 4세손 대인수()가 선왕()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키고, 또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현토주()를 설치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 15부() 62주()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이 결과로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에 야율아보기()는 거란족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에 멸망시켰다. 이때 발해는 귀족 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이로써 15대 왕 230년간 지속된 발해의 역사는 끝이 났다.

거란은 발해고지()에 동단국()을 세우고 거란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 유민은 곳곳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그것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발해유민 가운데 수만 명은 고려로 투항하여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현재 전하는 발해 귀족의 성씨 가운데 왕성()인 대씨() 다음으로 고구려계인 고씨()가 많았던 것에서 고구려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속일본기()》에 전하는 발해국서(:일본에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하였다.

또 문왕은 스스로 ‘고려국왕()’으로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장한 ‘천손()’을 일컫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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