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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고대사의 숨은 이야기 4.

by sang-a 2009. 1. 13.

전환기의 사람들 (궁예. 견훤. 왕건)

 

 궁예와 견훤이 반란을 일으켜 16세기 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궁예는 현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라 전해진다. 경문왕의 서자라면 진성여왕과는 이복 형제 사이다.

왕족간의 왕위 계승 다툼이 치열한 때에 상해될 뻔한 궁예는 유모 덕택에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한쪽 눈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절에서 승려로 있던 궁예는 타고난 기질은 속일 수 없어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환속한 후 도둑의 무리에 가담하여 가장 밑바닥에서 출발했다. 기훤의 부하였다가

양길의 부하가 된 후 자신의 세력을 형성, 오히려 양길을 치고 통치가의 면모를 갖추어 호족 세력까지

지배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국호를 후고구려로 한 것은 아마도 버림받은 자의 오기에서

나온 생각이었을 것이다.

 통치가로서 궁예는 두 가지로 묘사된다. 먼저 버림받은 신라의 왕족출신이란 점이 그에게 반신라적

성향을 부각시켜 신라의 몰락을 재촉하며, 또한 스스로 왕이 된 뒤엔 지나치게 격식에 빠져 자신의 몰락을

자초했다고 본다.

 하지만 신라의 왕족이어서 그에게 득이 된 것은 없다. 낡은 쪽의 인물로 간주되어 개혁을 담당할 수 없는

이유가 되며, 신라에 반기를 든것 자체도 반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도둑 출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서, 즉 무식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이 없어서 몰락한

궁예로 묘사된다. 국호를 여러 번 바꾸고 수도를 옮기는 것 등이 모두 자기 기반이 약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도둑이 되기 전에 승려였다. 당시 사회에서 승려는 귀족들과 더불어 지식 계층이다.

 승려로 자랐으므로 궁예가 아무리 기질이 괄괄해도 일자무식의 도두고가는 질적으로 달랐다.

파로간회 행사를 처음 실시하며 불경 20여권을 쓰기도 한 궁예였다.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지도 못하는 최하층 떠돌이 유민들과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하면서 그들을

일개 도둑에서 강력한 군인으로 결집시킨 궁예는 그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산 채로 서방 정토에 가는것이 꿈인 이들에게 궁예는 지금 이 땅엣 그 꿈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국가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혔다고 생각한 궁예는 서방 정토의 실행에 나선다. 자신이 바로 미륵불이고

두 아들이 보살이며 후고구려, 즉 태봉이 바로 서방 정토인 것이다. 아직 후백제나 신라와의 대립이

끊이지 않은 전쟁 상태였다. 관념적 이상 세계의 어설픈 실현 모습은 이백여명의 아이들이 시중을 들고

꽃과 비단으로 장식한 겉치레 속에 파묻힌 궁예로 나타났다. 형식과 이상의 간격을 그는 광기 어린

독재로 메우려 했다. 궁예의 광기는 자기 자식과 부인을 죽일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견훤은 농민 출신으로 건장한 체격에 활달한 기백을 지녀 일찍이 군인이 된다.

지렁이가 밤마다 한 처녀에게로 와 낳은 아이였다든지 어린 시절 강보에 싸서 밭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젖을 먹여 주고 갔다는 일화 등은 그가 낮은 신분임에도 남달랐음을 상징한다.

 견훤은 젊어서 서남해안의 수비를 맡아 공을 세워 비장으로 출세하나, 신라의 골품제 사회에서 자신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닫고는 완산주(전주)까지 점령한 후 '옛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씻어 주겠노라'라며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앞세워 힘으로 세력을 규합한 점은 역시 궁예와 같으나, 견훤의 근거지인

서남해안은 일찍이 중국과의 무역로이며 지방 해상 세력이 중국, 일본과의 개인 무역을 활발하게

벌이던 곳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견훤은 이런 조건을 이용, 꾸준히 중국의 후당,오월 및 거란, 일본 등에 사신을

파견하고 외교 관계를 맺는다. 삼국시대 말기와는 달리 후삼국 시대에는 중국의 당이 망하고 5대10국이

들어서는 격변기로 중국과의 교류가 우리나라에 예전처럼 실질적인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나 어느

정도 국가의 위신을 높여 주는 역할은 했다.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 견헌이나 궁예에 비해 왕건은 온화하고 인덕이 풍부한 보통 사람으로

묘사된다. 왕건이 어릴 때 아버지 왕륭은 송악의 호족 출신으로 궁예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가 청년이 되어

활동에 나선 때는 궁예가 왕이 되어 자리잡은 후이다.

 왕건은 견훤보다 10살이 어릴 뿐이나 모반자가 아니라 새 국가의 촉망받는 유능한 장군으로 부각된다.

육지에서뿐 아니라 혈구진(강화)에서의 해상 경험이 있는 왕건은 견훤의 해상 세력이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막고자 금성 (전라도 나주)을 공격,점령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궁예의 신임을 얻어 시중으로 임명,

제2인자가 되었다. 독재자가 된 궁예에게 반발한 군인들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황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왕건은 처음에 다음과 같이 거절하였다.

 "비록 임금이 포악하고 잔인하다 하지만 신하인 내가 어찌 딴마음을 갖겠소. 신하로서 임금을 가리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덕도 없는 내가 어찌 감히 은주의 일을 본받는단 말이오. 나라를 다스릴 만한 지혜도

없는 사람이니 도저히 안 될 말이오."

 군인들은 거듭 권했다.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며, 기회는 만나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운 법입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죄를 받는 법이지요.지금 정사가 문란하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이 곤궁에 빠졌는데

'덕망으로는 공보다 나은 이가 없습니다. 어서 결정을 내리십시오."

 "인(仁)으로써 불의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있어 온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아녀자인 저로서도 분이 치밀어오르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오죽하겠습니까?" 민심이 이렇게 변하니

하늘의 뜻이 정해진 겁니다."

 부인까지 갑옷을 입혀 주며 나설 것을 권했다. 신라가 아직도 엄연히 존재해 있는 때에 반란을 일으켜

세운 나라ㅡ이 장군이 새삼스레 딴마음 어쩌구 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며 의례적인 말로 들린다.

 왕건은 지금이 바로 궁예를 몰아낼 때라는 생각에 합의하고 자신들의 군사력을 이용한 구체적인 모반

계획에 대해 면밀한 검토를 하였다.그가 혹시라도 주저했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다른 군인들의 확고한 지지에 힘입은 왕건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들이 계획한 모반은 성공하고

궁예는 변장을 하고 도망가다가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왕건은 918년 국호를 고려로 바꾹 왕위에 오른다. 이 소식을 듣고 견훤은 축하 사신을 보냈다.

견훤은 과격한 궁예보다 온건한 왕건이 상대하기 쉽다고 여겼다.

 왕건은 실질적인 개혁에 힘써 자신의 세력이 미치는 지역의 백성들에게는 조세를 감면해 주고 자신의

세력권 밖의 호족들에게는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중앙으로 끌어들인다.

 반면에 강력한 군사력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 국가를 이끌어 가려는 견훤은 전쟁을 통해서만

세력을 확장하였다. 견훤은 고려가 차지한 경상도 북부의 조물성을 공격하였다. 후백제의 군사력이

고려보다는 확실히 한 수 위인 것으로 드러나자 견훤은 본격적으로 신라 공격에 나섰다. 이때

신라는 경상도 일대로 위축된 작은 나라였다. 견훤은 문경,영천 지방을 습격하고 서울인 경주까지

기습 공격하였다. 다급한 신라는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군대를 이끌고 달려온 왕건은

견훤의 군대와 공산(대구)에서 마주쳐 일대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왕건 자신이 겨우 살아 돌아갈

정도로 고려군의 참패였다.

당시 후백제군의 병력은 고려군보다 갑절이 많았다.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는 곳곳에 이런

강력한 군대를 지닌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메추라기 같은 신라와 고려가 매 같은 후백제를.....당신은 나의 말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쇠털

하나도 아직 뽑지 못하였소..... 나의 목적하는 바는 평양성의 성루에 활을 걸고 대동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오만..."

 반면에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장은 계속된 전쟁으로 농민들의 생업종사가 힘들어지고 군인들이

쉬지 못하게 된 책임을 후백제에게 돌리면서 동시에 경주 공격을 불의한 것으로 강도 높게 비판하는

도덕적인 내용들이다.

 그 후로도 견훤은 경상도 서부 지역을 공격하여 계속 승리하나 민심은 오히려 왕건에게 기울었다.

많은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하였다. 왕건은 전쟁에 지고도 세력을 넓혔다.

 고려군은 930년 병산(안동)을 공격해 온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여 후백제에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고려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마침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아들들에게 쫓겨난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망명하였고, 신라의 경순왕 역시 고려에 자진 항복하였다.

936년 , 왕건은 후백제 토벌에 나서 승리하여 후삼국의 통일을 이룬다.

 보통 사람 왕건은 통일 고려의 첫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호족 세력의 포섭을 위해 보통 사람답지

않게 40여 차례 결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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