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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종로의 발자취(조선시대)

by sang-a 2009. 10. 16.

 
 
 

조선시대 한성부는 도읍으로 정해진 뒤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와 전조후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종묘와 사직단 및 각종 관아와 시전 건물이 건설되고, 도성과 문묘, 교량 등의 축조가 이루어져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특히 지역적으로 이와 같은 왕도의 기본시설들이 북악산, 인왕산, 낙산과 개천(청계천)으로 둘러싸인 도성내의 북반구에 위치함으로써, 오늘날 이 지역과 그 서, 북, 동쪽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종로구 지역은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왕조의 핵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 태조,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수도 한성보는 완성되어 갔다.

시대별 한성부 건설과정
* 태조 :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여 새 서울 한성건설
* 태종 : 창덕궁건설과 경복궁 수리증축
* 세종 : 태조,태종 때에 구축한 수도의기본시설을 바탕으로, 소박하고 미비한 부분을 보강하여 증축.
경복궁 수리증축 ,사정전, 경회루,강녕전을 중



태종 10년(1410)에 다시 시전 건물을 건립하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때 수립된 서울의 시전 건설계획을 보면 그 위치가 모두 오늘날 종로구 지역으로 종로구 지역이 조선시대 시전상업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대시는 장통방
지금의 장교동, 관철동 지역.

미곡과 잡물전
* 동부 - 연화동구 : 지금의 연지동 부근
* 남부 - 훈도방 : 지금의 저동 근처
* 서부 - 혜정교 : 지금의 종로1가 복청교가 있던 곳
* 북부 - 안국방 : 지금의 안국동 부근
* 중부 - 광통교 : 지금의 남대문로 광교가 있는 부근
우마시장은 장통방의 천변



조선시대 한성부의 간선도로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그 앞에 육조거리가 형성되고 다시 동쪽으로 시전거리가 이루어지면서 자리잡게 되었다. 관아, 도성과 문루 등이 세워지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이 동, 서, 남, 북, 중부의 5부 52방으로 정해짐에 따라 이들간 통행도로가 건설되었다. 도성 내의 도로망 건설 뿐만 아니라 전국의 역원제, 봉수제 등 통신제도를 한성부 중심으로 개편함으로써 종로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이루어졌다. 그 후 태종, 세종, 세조, 성종대를 거쳐 『경국대전』이 완성됨으로써 전국적인 도로망의 정비를 보게 되었다.


도성내의 도로

도성내 도로는 성벽 안에 건설되었던 것인데, 이 도로가 모두 성벽과 성벽에 세워졌던 숭례, 흥인, 돈의, 혜화, 창의, 광희, 소의 등 대소 7개의 성문을 통하여 성 밖의 도로망과 연결되도록 되어 있었다.
 

서울의 대로


동서남북의 정문을 관통하는 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황토현(황토마루;현 세종로 네거리)으로부터 종루(현 종로 네거리)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는 길과, 종루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길이 행랑, 시전 등이 운집, 교통왕래가 가장 빈번하여 유명하였으며, 서대문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길은 서울 시내를 동-서로 연결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도로로서 현재의 신문로-종로로 연결하는 길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서울의 중로


광희, 혜화, 소의의 소문으로 통하는 길이었으며, 기타의 도로를 소로로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처럼 넓은 길과는 대조적으로 겨우 3척 정도의 골목길도 있었다. 이 밖에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 앞에는 대로가 건설되어 좌우 양편에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이 각각 나열되어 관청가로서 유명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선조 25년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수도 서울의 모든 시설은 불타고 파괴되었다. 경복, 창덕, 창경의 세 궁궐과 종묘,사직단 문묘이 불탄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후 불타 없어졌던 궁궐과 많은건물을 중축하는 시기였으면 혼란의 시기였다.


북벌계획이 추진되었던 종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환국하여 왕위에 오른 효종은 그 치욕을 설욕하고자 청나라 정벌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효종의 북벌 의지를 뒷받침한 대표적인 인물로 송시열과 이완을 들 수 있다. 그때 송시열은 송동(종로구 혜화동 과학고교 일 때), 이완은 사동(종로구 인사동)에 살았다. 따라서 효종의 북벌계획 또한 종로구 지역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실학이 발생과 종로 실학자


실학은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갖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개혁사상이었다. 실학사상은 정약용과 김정희의 제자들에 의해서 초기 개화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종로지역에 관련하여 실학을 살펴보면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이 종로구 창신3동 낙산의 한 봉우리인 지봉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8세기 후반 실학을 대표하는 이용후생학파의 박지원과 그의 규장각 사검서 제자인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상수가 박지원의 집이 있던 탑골공원 근처에서 이용후생을 토론하면서 활약하였다. 또한 실사구시학파를 이룬 김정히 또한 종로구 토의동에서 출생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실학의 3대 학풍 가운데 2개 학풍이 실로 종로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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