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 걷다보니 어느새 '바람의 언덕' 태백 매봉산·귀네미 마을세계일보 입력 2016.07.21 14:04
강원 태백 매봉산 정상 부근은 사계절 강한 바람이 불어 ‘바람의 언덕’이라 불린다.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서있고, 초록빛 배추밭이 끝없이 펼쳐져 색다른 여름 풍경을 경험할 수 있다. 해발 1300m가 넘는 곳이지만 길이 잘 닦여 있어 정상까지 승용차로도 편하게 오를 수 있다. |
강원 태백의 매봉산 정상에서 맞는 여름은 다르다. 여름을 대표하는 것들을 바람이 모두 날려버린다. 더위는 물론이고, 여름이면 떠오르는 피서지인 바다와 계곡, 울창한 숲 등을 잊게 된다. 해발 1303m에 이르는 매봉산 정상 부근을 ‘바람의 언덕’이라 부르는 것에 토를 달 만한 이유를 딱히 찾을 수 없다.
이곳은 강한 바람 덕분에 풍경이 시시각각 변해 지루할 틈이 없다. 흐린 날 찾아도 매력이 있다. 파란 하늘 대신 매봉산 아래로 펼쳐진 운해가 장관을 이룬다. 시간이 흐르면 운해가 산을 타고 올라 어느덧 주위를 덮어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여기에 거대한 풍력발전기는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바람의 언덕’ 부근에 도착하면 풍력발전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멀리서 보면 하얀 풍차가 연상되지만, 다가갈수록 거대한 모습에 고개가 절로 젖혀진다. 거기에 ‘쉑쉑’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날개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바람의 언덕’ 정상엔 풍력발전기 말고 이곳을 상징하는 작은 풍차가 있었지만 2012년 철거됐다. 추억의 한 장면이 잊히는 듯 아쉽다.
파란 하늘과 산봉우리, 풍력발전기가 어우러진 풍경은 사계절 언제나 볼 수 있다. 바람 역시 연중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여름에는 여기에 초록빛이 더해진다. 사계절 내내 바람이 부는 ‘바람의 언덕’ 아래로는 초록빛 배추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때가 지나면 다시 흙빛이다. 여름을 잊게 하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배추밭의 푸르름을 볼 수 있는 때는 딱 이때뿐이다. 예전엔 한 해에 두 번 배추 농사를 지었지만, 지력이 약해지자 농사를 한 번만 짓는다고 한다.
경사진 산기슭은 온통 배추밭이다. 농민들이 매봉산 기슭에 이것저것 심어봤지만 돌이 많고 물이 잘 빠져 대부분 작물이 실패하고 유일하게 성공한 작물이 배추였다고 한다. 흙밭이었던 이곳은 점차 배추밭으로 변신했다. 평지도 아닌 경사가 심한 곳에서 농사짓는 것이 쉬울 턱이 없다. 강원도 사람들을 ‘비탈’로 불렀다는 얘기가 확연히 느껴지는 곳이다. 농민들에겐 생존을 위한 터이지만 이제는 태백을 찾는 이들의 이목을 끄는 장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1300m가 넘는 곳이지만 배추를 시장으로 내다 팔기 위한 길이 잘 닦여 있어 정상까지 승용차로도 편하게 오를 수 있다. 차가 없을 경우 삼수령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 걸어가면 된다. 다만 배추를 수확하는 8월 말에는 차를 몰고 정상까지 못 갈 수 있다. 고랭지배추 재배농가들이 작업에 불편을 겪을 정도로 여행객이 몰리자 차량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한여름에 이곳을 찾더라도 바람막이용 외투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사방으로 확 트인 풍경을 오래 감상하고 싶겠지만 서늘함이 느껴지는 바람에 마음 같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태백에는 ‘바람의 언덕’과 비슷한 풍경을 갖고 있는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삼수동 귀네미마을이다. 해발 1000m에 자리한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차를 타고 외길을 따라가면 사방이 배추밭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 소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우이령이라 불렀다가 귀네미마을로 불리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댐으로 수몰된 지역의 주민들이 이주해 와 마을을 이뤘다. ‘바람의 언덕’보단 적지만 이곳에도 배추밭 위로 풍력발전기 날개가 바람을 가르고 있다.
‘바람의 언덕’과 귀네미마을에서 양편을 바라보면 서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멀리 풍력발전기가 보이면 그곳이 귀네미마을이고 ‘바람의 언덕’이다. 마치 강한 바람에도 잘 지내고 있느냐는 듯 안부를 묻는 것처럼 말이다.
태백=글·사진 이귀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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