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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 예술 ◑

격렬한 투쟁과 오감의 논객/김정란

by sang-a 2007. 3. 8.
격렬한 투쟁과 오감의 논객/김정란

 

 

김정란 (시인, 상지대 교수)

1953-01-01 [양]

서울 출생

외국어대 불문과 및 프랑스 그로노블3대학 졸업

 

 어두움의 기록 1
나는 어떤 어두움에 얻어맞은 것인가.
어떤 결핍에 의하여
내 실존은, 본질에 대해,
이토록 민감하게, 거의, 물리적으로
感을 잡으면서도,

어떤 형식의 不在에 의하여
이토록 그것으로부터 늘
이반되는가, 대체,

세계의 밝음, 세목의 즐거움에서
놓치지 않고 그림자, 결핍의 예감을
감지하는 이-존재의 뻐그러짐.

나는 머리를 쳐든다, 알 수 없다
이 절망의 뿌리에서 나를 지켜주는
이 지독한 갈증, 그것의
성실성이 얼마나 끝간 데를
모르는가를.

나는 세목의 확인에서 빛의 예감에까지
철저히 움직인다. 일단은,
그 수밖에 없다. 얻어맞은 자아여

치유 너의 아이덴티티를
꿈꾸며. 눈을 뜬 채. 세계의
세목으로부터 절대로
눈돌리지 않은 채로.  詩. 김정란

잔혹한 외출 / 김정란

바다
해가 졌다
저녁내 흔들리는 모랫벌
대낮은 편안한, 규정된 부피를 부정하는
칼처럼 달이 뜨고
바람이 잔잔히 불기 시작한다
살이 저며지고 있다
아니, 오해 마시기를
이건 부패가 아니다,
싱싱하고 생생한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살의 이별
결 따라 완벽하게 저며져 뼈를 떠나는 삶
희디흰 뼈 눈부시게 드러나고
바람과 바람의 결 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던
잊혀진, 강렬한 말들이
핏줄 위에서 널을 뛰기 시작한다
잔혹한 외출
최소한의 삶으로 버티던 여자 하나, 모랫벌을 달려가
시퍼런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 * *

 

 영혼의 일란성 쌍생아
- 김정란의 '雪國-검은 반점들' 권명환(gipsy)

하루종일 가슴에 낮은 바람이 불었다

 
그리곤 밤에 눈이 내렸다 <그>가 문득 세계의 끝으로부터 휙 날아왔다 가만히......어두움의 동굴 속에서......아주 낯설어진 너무나 가벼워진 내가 <그>에게 물었다
누구?

어두움이 섬뜩하게 거대한 원을 그리며 선회하고 그리고 그 어두움의 끝이 불길하게 흔들렸다 캄캄해 내 눈 속에서 이리처럼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가슴속에서 태초의 혼돈이 미친듯이 날뛰며 일어났다 알 수 없는 규정할 수 없는 잔인하고 절대적인 無......그러나 냄새, 잠깐 스치는, 기이한, 거의 물질적인 확실성, 어느 미지의 낯선 내가 나도 모르게 동의하는......

차가운 바람이 휙 사물들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나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눈발이 일제히 잠깐 푸르르 흔들렸다......<그>가 가는 것일까......사물들이 편안함으로부터 뿌리째 뽑혀나와 으르렁댔다 나는 내 살 깊은 곳에서 투명하게 떠오르는 비물질적인 검은 반점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들리지 않는 소리의 왕국에서 작은 핏톨들 밑의 보이지 않는 다른 핏톨들이 왕왕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1. 저주받은 말
현대인의 방향성의 상실을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지표는, 존재를 드러내는 말言의 '전락'이다. 말이 스스로의 충만함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그 자체로 충만한 삶의 존재방식을 망각하고 사물과 존재의 단절, 우주와의 소통불능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외계인의 지구침략 파일은, 현대인을 '허무개그로 대화하는 바보들, 지하철의 빽빽한 틈바구니에서도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상한 종족, 하루일과는 길 잃고 헤매임 '이라 적지 않을까. 18세의 정신분열증 환자에게서 들은 이 황당한 상상은, 그러나, 가볍게 흘려 넘길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인간은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진 것이다. 여기, 우리가 신성(神聖)이라 불렀던 지점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극단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면서 동시에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회복하려는 시인이 있다. 말에 주술을 걸고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 갱신으로의 시쓰기. 김정란은 박탈당한 실존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인간을 찾는 일에 운명을 건 시인이다. 오직 존재 혁명을 꿈꾸며.

혹시 여러분은 김정란의 '사이렌 사이키'를 듣거나 그녀의 시를 소리내어 읽을 때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으셨는지. 편안한 리듬의 흐름에 안심할 찰나, 섬뜩함, 소름끼침, 텅 빔, 황량함, 충만함이 휙 스치지 않으셨는지. 그때 말의 철창을 부수고 내면으로 습격하는 낯선 이미지와 맞닥뜨리진 않으셨는지. 김정란은 사물과 말과 시간이 단절된 끔찍한 현장의 한복판에 스스로 몸을 던져 고립된 존재를 매개하는 내면의 영매(靈媒)이다. 따라서, 우리가 겪은 이상한 경험은, 이미 오래 전에 감작되었으나 잊고 지낸 존재의 기억을 순식간에 일깨우는 내면의 알레르기 반응이다. 김정란이 유발한 내면의 알레르기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고립된 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말은 존재를 드러내려는 욕망이니까. 아울러,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을 통해 우리가 시를 낭송하는 행위는, '전락'한 말을 일깨우는 일종의 주문(呪文) 외우기니까.

그리하여, 괴상한 시읽기를 이 자리에서 제안한다. 자, [죽은 시인의 사회]의 구성원들도 직접 경험해 보시길. 여러분의 눈을 김정란의 시 '雪國-검은 반점들'의 첫 행 한 가운데에 고정하고 아래로 쭉 읽어보시길. 여러분의 눈에는 '낮은 바람' '섬뜩하게' '흔들렸다' '투명하게' '검은 반점' '핏톨'과 같은 말이 보일 것이다. 그 말들은 황량한 벌판에 각자가 고립되어 있다. 다시, 말들이 고립된 풍경을 가만히 보시길. '낮은 바람'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서늘하다. '흔들렸다'는 자꾸 어딘가에 기대려 한다 어쩐지 불안하다. '투명하게'는 이상한 진흙을 몸에 덧칠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팔이 지워지고 얼굴이 지워진다. '핏톨'은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점점 오그라든다. '검은 반점'은 저만치 떨어져 꼼짝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유배지처럼. 죽은 말(言), 저주받은 말들.

2. 리듬 - 지독한 배고픔
고립된, 황량한, 저주받은 말을 향하여 김정란은 주문을 외운다. 언어에 내재한 비밀스러운 힘을 일깨운다. 주문을 외워 말을 불러모은다. 주문을 외우자 고독한 말, 저주받은 말이 일순간 긴장한다. 말이여,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는 순간, 그대는 알 수 없는 운명에 휩싸인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주술에 취해 배타적이던 말들 각자의 적의가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말에 존재하는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을 일깨워 서서히 리듬을 형성한다. 주술과의 접점에서 긁히는 말의 마찰력(摩擦力)으로 리듬은 새로운 리듬을 부른다. 고립된 말들은 마침내 변화무쌍한 통일체로 흐른다. 김정란은 대지와 우주의 리듬에 자신의 리듬을 조율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녀가 24세에 쓴 '백골이 만나는 여름'이라는 시를 보자. 눈으로 읽었을 때 일견 유치하게까지 보이는 이 대목, 사이보그의 음성을 패러디한 것으로도 읽히는 이 대목,

그래 생각해 보자 나는 내 세포를 들여다보았지
세포들이 말한다 눈치챘다 오바
여기는 바야흐로 내리막길 오바
생장 중지 오바
준비 완료
자동 시스템 가동 시작
오바 오바 오바

내 가족과 조상들이 비로소 말을 걸기 시작했다
- '백골이 만나는 여름' 중에서-스.타.카.토. 내 영혼

는, 그러나,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을 때, 우리는 곧 기이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 리듬은, 제의에서 둥 둥 둥 북을 두드릴 때의 단순함을 닮았다. 단순한 리듬의 반복은 순수한 믿음이며 순결한 소망이다. 둥 둥 둥 오바 오바 오바 반복되는 리듬은, 죽은 시간과 현존하는 시간 사이의 가교(架橋)이며 원형적, 신화적 시간에 대한 지독한 배고픔이다. 보라, 이어지는 시구 "내 가족과 조상들이 비로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는 김정란 식 주술의 증좌(證左)가 아니겠는가.

사람은 그 자체로 리듬이다. 피의 흐름이 판막을 치고 솟구쳐 오르는 순간의 격렬함과 사지(四肢)의 말단으로 천천히 밀려드는 피의 잔잔함, 김정란은 그 자체로 리듬이다. 즉, 시 '雪國'의 리듬은 김정란의 내면 그 자체이다. 낮은 바람이 불던 내면에 낯선 타자가 출현한다. '가만히......' '동굴 속에서......'의 말줄임표는 기다림의 자세이며 부재하는 있음, 곧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기다림이다. 그러나, 리듬은 순식간에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균열! '태초의 혼돈이 미친 듯이 날뛰며' 내면의 균열 사이로 존재의 이면이 솟아오른다. '냄새, 잠깐 스치는, 기이한, 거의 물질적인 확실성, '의 쉼표는, 리듬의 흐름에 의식이 개입하는 자리이며 그 자체로 내면의 균열이다. 그러나, 거부하고 싶은 불편함 속에서도 '미지의 낯선 내가 나도 모르게 동의하는' 순간, 타자와의 겹침! 타자가 떠난 뒤에도 내면에는 '투명하게 떠오르는 비물질적인 검은 반점'이 남는다.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몽고반점. 그녀는 7~8살이 되기 전에 사라지는 몽고반점을 지금도 가지고 있단다 얼레리꼴레리.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몽고반점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다만 잃어버린, 다만 부재(不在)하는 현존을 부정할 수 있을까? 김정란의 몽고반점은 내면이 기억하는 타자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김정란의 몽고반점은 길이가 얼마나 되지? 5mm 이면서 5km? ('나는 찍찍 늘어난다 나는 5mm이거나 5km이다/ '여자의 말' 중에서) 결국, 김정란의 리듬은 우주의 리듬을 지향한다. 김정란의 리듬은 내면 그 자체니까. 김정란의 내면에는 수많은 몽고반점이 있으니까. 김정란은 수많은 타자니까.

3. 이미지- 벌거벗은, 나체(裸體)의
김정란의 시는 관능적이다. 여기서의 관능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는 말이다. 전술한 것처럼 말을 유혹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하나는 나체(裸體)의 이미지라는 의미에서다. 그녀는 천박한 서술을 거부하고 벌거벗은 이미지로 시를 쓴다. 이미지는 의미와의 거리를 단번에 없애며 이미지 그 자체로 다른 이미지를 부른다. 이미지만으로 쓴 그녀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아무런 여과 없이 즉각 실재에 도달한다. 현미경으로 자신의 피부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완충장치가 없는 실재는 우리를 당황케 한다. 이때의 실재는 부재하는 현존이다. 김정란은 우리가 다만 잊어버린, 영혼이 기억하는 실재를 벌거벗은 이미지 그대로 보여준다. 잔혹한 순수. 김정란의 시에서 벌거벗은 이미지는 본질적인,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단번에 마주보게 하는 에로티시즘이다.

때로 김정란의 이미지는 스캔들을 일으킨다. 우리의 사유토대를 무너뜨리는 모순어법, 무더위 속에 얼어붙은 영혼이 등장하고 ( '그러니 더위쯤 무서울 게 없다. 내 영혼은 영하 50도의 서릿발처럼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다'-내면의 천사 중에서), 없는 장소에 내가 서 있고 ('없는...... 장소에 내가 서 있다'- 雪國-쌓인 눈 중에서),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가 바라본다.( '살아서 그렇게 한없이 당신을/ 바라보던 죽은 자들의 눈알들 -雪國-어리석은 사랑 중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김정란은 무의식과 의식을 끊임없이 가로지른다. 보라, 그녀는 시 '雪國- 검은 반점들'에서 '물질적인 확실성'과 '비물질적인 검은 반점'이라는 무의식과 의식, 육체/비육체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것은 김정란의 무의식이 의식을 피해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존재가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 내려는 자리이며 무의식, 곧 우리가 억압했던 타자로 뛰어들어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는 자리이며 우리가 어떻게 타자들을 억압해 왔으며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를 반성케 하는 자리이다. 김정란은 시집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에서 우리가 억압해 왔던 죽은 여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말하게 하고, 균열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행위를 반성케 하고, 타자와의 매혹적인 겹침, 그 신성함에의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균열, 존재의 균열은 낯설고도 두려운, 무섭고도 매혹적인 신성함에의 직면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며 너무나 존재가 되는 것이다.

4. 영혼의 일란성 쌍생아
김정란 시의 리듬과 이미지는 일란성 쌍생아이다. 하나의 접합자(zygote)에서 기원하여 분열한 일란성 쌍생아, 공통의 태반 안에서 각각의 양막에 둘러싸여 서로를 응시하는 리듬과 이미지, 영혼의 일란성 쌍생아. 공통의 내면에서 김정란의 주술은 저주받은 말을 유혹하고, 리듬을 부르고, 리듬은 이미지를 일깨우고,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에 겹쳐 스며들고, 또 다른 이미지로 새로운 리듬을 유발하고 다시 리듬은 우주의 리듬에 편입된다.

고립된 시어(詩語), 김정란의 주술에 유혹되어 신들린 리듬으로 춤추다가, 존재의 극단에 가는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는 말. 입술이 부르튼 말, 쉴새 없이 수다떠는 입술이 아니라 쉴새 없이 침묵을 재잘거려 입술이 부르튼 말. 흔들렸다. . . . . . . 의 말줄임표. 이 모든 김정란의 말(言)은 종국에는 기다림의 자세를 취한다. 영혼을 움직이는 리듬을 향하여, 그러한 방향성의 자세를 사랑이라 명명할 수는 없을까? 사랑은 대상과의 거리를 지우는 축지법이다. 비록 짝사랑이라도 마음은 대상에게 벌써 달려가 있다. 그런데, 사랑은 또한 한 걸음에 그대에게 다다를 수 있지만 두 걸음에 그대를 지나칠 수 있는 눈 먼 축지법이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그대와의 거리 지우기에는, 다다르는 방식, 곧 자세가 중요하다. 김정란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연둣빛, 분홍, 눈(雪)은 김정란의 기다리는 자세를 내포한다. 그대와 나의 스침에서 서로의 내면을 비워두지 않으면 각자가 스며들 수 없다. 연둣빛, 분홍, 눈(雪), 꽉 껴안았을 때 그대와 나의 빈 공간으로 스며드는,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채우는, 기다림의 자세, 그 겸손한 자세를 사랑이라 부르면 안될까.


*이 원고는 김정란 시인 홈페이지에서 만난 네티즌들이 주축이 되어 열렸던 <시를 주제로 한 파티-죽은 시인의 사회(1)>에서 발표되었던 평론입니다.

(본 자료는 지식인들이 모여만든 카페 라니의 집에서발췌해왔습니다.) -치앙마이-

 [논쟁] 남진우 vs 김정란‘비판논쟁’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가 문학전문지인 <문학동네> 겨울 호를 통해 같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정란의 도덕성과 비평가 자 질, 문학권력 행사를 독하게 비판하고 나서 문단 안팎으로 화제를 불 러일으키고 있다. 이를 놓고 네티즌 사이에 설왕설래가 뜨거운 가운 데 김정란이 본지에 반박문을 보내왔다. 독자들 이해를 돕기 위해 쟁 점과 관련된 남씨의 비판내용은 원문에서 발췌해 싣는다.(편집자 주)
◆남진우/기회주의적 비평과 막무가내식 언어폭력

시전문지 〈현대시〉 12월호-김정란·이희중·남진우 등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동 중인 세 명은 97년 시단의 주요 경향과 성과를 대담 형식으로 정리했다-를 펼쳐보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언희의 시에 대한 나의 평가를 반박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김정 란의 극렬한 발언은 그 자체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 라 대담의 사회자이자 최종 정리자로서 그녀에게 주어진 권한을 훨 씬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절차의 부도덕성에 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서면 대담의 일반적 관행을 따르지 않고 김씨처럼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 정면 으로 반박을 하려 할 경우 최소한 그것이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에 상대편에게 연락을 해서 자신의 반박을 다시 재반박할 기회를 주거나 아니면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라도 구하는 것이 예의 아닐까. 그렇지 않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대담문을 손질한다는 점을 악용하여 일방적으로 의기양양하게 상대방을 공격한 다음 시침 뚝 뗀 채 “자, 화제를 바꾸어보죠”라고 하며 다른 테마로 넘어가는 것은 지극히 비열한 태도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김씨가 주장하는 “윤리적 파탄 에 이른 우리나라 정치 행태”를 고스란히 빼닮은 “우스꽝스러우면 서도 참담한” 행태가 아닐까. 김씨의 이런 몰상식한 행태-김정란을 비롯해 이런 부류의 논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면 “뒤통수 때 리기”-덕분에 나는 얼결에 면전에서 비판을 당하고도 아무런 항변 도 못하고 다음 화제로 넘어가는 것을 용인한 ‘순한 양’이 되고 말았다.

절차상의 부도덕성과 더불어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김언희 의 시에 대한 비판의 구체적 내용이다. 만일 그 비판이 타당성이나 균형감각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 사줄만한 점이 있다면 나나 김언희 씨나 쓴약 먹은 셈치고 감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언희의 시에 대한 김정란의 비판은 일말의 설득력은 고사하고 그런 방약무 인한 말을 한 당사자의 인격과 문학적 수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 만큼 저열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씨는 김언희의 시가 “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강간”이라고 주장 하는데 내가 보기엔 정작 김정란이야말로 김언희라는 한 구체적인 개인에 대해, 그리고 그의 텍스트에 대해 강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막무가내식의 언어폭력을 비평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언희의 시에 표현된 여성의 성과 육체 에 대해선 공간과 동의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소녀적인 자기애와 관념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를 주로 쓰고 좋아하는 김정란이 김언희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취향과 인식의 편차에 따라 극히 다양 한 반응과 평가가 있을 수 있는 것을 무시하고 이처럼 멋대로 대상 이 되는 시인과 시를 “난도질”하고 “그 몫을 문학적으로 챙기려 드는” 김정란의 “비평적 선택”은 정말이지 “무슨 짓이든 마다않 는 정치가들” 못지 않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번 따져보기로 하자. 도대체 김정란이 주장하는, 김언희 시인이 챙겼다는 “문학적 몫” “자신의 몫”이 과연 뭐란 말인가. 내가 김언희 시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방 소 도시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꾸준히 시를 써서 발표해오고 있다는 사실 정도이다. 이 시인은 누구처럼 서울에서 발행되는 주요 문예지 의 편집위원이나 현 정부의 문화행정의 브레인으로 참여해서 이른바 ‘문단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떠들썩한 사회적 쟁점을 불러일으켜서 저널리즘을 자주 장식하는 시인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시집이 특별히 잘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인 것도 아니며 무슨 유명 문학상을 탄 것도 아니다. 김언희의 시에 대한 김 정란의 장황한 발언에서 정작 김정란 자신의 “문학적 파탄”-김정 란은 세계사 시인선 100권 발간 기념시집 〈내 몸이 시다〉 해설에 서 김언희를 “한국시단에서 주류로 편입되기 힘든 시인”이자 세계 사 시인선이 아니었으면 잃어버렸을 “빼어난 시인” 중 한 사람으 로 칭찬했다-만을 발견하고 마는 것은 씁쓰레한 느낌을 안겨주기에 족하다.

김정란은 문학적으로 자신을 옹호하고 다른 작가나 시인을 비판할 때마다 표나게 ‘여성’이라는 점을 앞에 내세우곤 한다. 자신의 문 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도 자신의 문학이 지닌 여성성 때문이 고 어떤 여자시인이나 작가가 호평를 받은 것도 남성평론가들의 보 이지 않는 음모의 결과라는 식이다. 비유하자면 페미니즘은 김씨의 논법 속에서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와도 같은 역할을 떠맡고 있다. 자신과 자신이 편애하는 작가 시인들에게 그럴싸한 후광을 부여하고, 싫어하는 작가 시인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도구 로 활용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상실한, 가장 타락한 형태의 페미니즘이란 구호밖에 없다. 그때 페미 니즘은, 김언희의 예에서 익히 보았듯이 자신의 조잡하고 감정적인 작품평가를 위장하는 이데올로기적 포장지에 불과하다.

◆김정란/비열한‘건수잡기’와‘왜곡 보도’의 합작품

〈문학동네〉 기획실장 남진우의 김정란 비판은 옹색하고 비열하다. 그의 비판내용은 세 가지 정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문제가 된 대담 정리과정의 비도덕성 ▲기회주의적 비평 ▲김정란의 문학권력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남진우는 무려 3년 전 대담을 문제삼고 나왔다(1997년 〈현대시〉 12 월호). 내가 사회를 보았으며, 남진우와 이희중이 대담자로 참여했다. 대담은 서면 대담으로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질문 문항을 뽑아서 대 담자들에게 보내면, 대담자들이 준비해와서 맞추어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대담자들의 입장을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지만, 대담의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사회자는 서면대담을 취합 정리하는 과정에서 흐름이 자연스러워지도록 편집하게 된다. 당시에 서면으로 제출된 내용은 너무 길이가 짧아서, 도저히 대담의 모양새 를 만들 수가 없었다. 마감시간에 쫓기고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대담이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지도록 정리를 맡은 내가 급히 채워넣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대담 당시에 충분하게 이야기되지 못했 던 부분들을 채워넣은 것이다. 정리된 대담을 다시 대담자들에게 보내서 한 번 더 정리하는 것이 온당한 수순이지만, 시간에 쫓겼고, 또 전체적인 맥락이 바뀐 것이 아니므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당한 수순을 밟지 않았던 것은 분명히 나의 잘못이다. 이 자리를 빌어서 남진우씨와 이희중씨 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점이 그토록 ‘비도덕적’ 이 라고 판단되었다면, 당시에 문제를 제기해서 바로잡았어야지, 아무말 도 하지 않고 있다가, 3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왜 그 문제를 엉 뚱한 맥락에다 붙들어 매어서 새삼스럽게 거론하는가 하는 점이다.

남진우는 내가 김언희 시인의 시를 강하게 비판하다가, 기회주의적으 로 입장을 바꾸어서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남진 우가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글은, 김언희 시인론이 아니라, ‘세계사 시인선’의 편집방향에 대한 논평이다. 나는 명성이나 문단 역학관계 가 아니라 문학적 참신성을 선택 기준으로 삼는 세계사 시인선의 방 향이 올바르다고 보았고, 그래서 세계사 시인선이 아니었다면 독자들 을 만날 수 없었을 시인들 중 한 사람으로 김언희 시인을 거론했을 뿐이다.

내가 김언희 시인을 거론했던 것은, ‘기회주의적 태도’ 때문이 아 니라, 오히려 공평함에 대한 근심 때문이었다. 내가 김언희 시인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은 어지간한 문인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오히려 김언희 시인의 이름을 다른 시인들과 함께 거론 하는 것이 온당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다 해서, 그녀의 독특함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이다. 비판하되, 그 존재마저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진우는 내가 〈문예중앙〉 편집위원과, ‘새예술의 해’ 문학분과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문단권력’을 휘두른다고 비난했다. 〈문예중앙〉은 중앙일보사가 아니라 ‘중앙 M&B’ 소속 이다. 게다가 편집동인들이 계속 편집권를 장악하고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2년 정도의 임기로 편집진을 교체한다. 권력화되기가 힘든다. 나는 문예중앙 편집위원직을 딱 1년 수행했다. 이명원 사태를 계기로 지난달에 사퇴했다.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새예술의 해 문학 분과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두고 ‘김대중 정부 문화행정 브레인’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예술의 해 기획은 예술장르실험에 정부가 약간의 지원금을 보조해주는 행사이다. 나는 멀티미디어포엠 제작을 기획했다. 12월이면 모두 끝난다. 이런 일이 일국의 ‘문화행 정 브레인’이 하는 일인가?

나는 남진우가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김대중 정부 문화행정 브레 인’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사용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남진 우는 기득권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정권의 홍위병’으로 묘사해 온 수구세력의 이미지 조작방식을 노회하게 차용한 것이다. 자신들의 비판자에게 ‘권력지향적’이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씌워서 그의 정당 성을 훼손하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런 맛깔스러운 메뉴를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조 선일보> 문제가 한복판에 놓여 있는 문화/문학권력 논쟁에 일절 함 구하고 있다가 이 건만은 기사화했다. 내가 반조선일보운동에 적극적 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남진우의 옹색한 ‘건수잡기’가 <조선일 보>의 특별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이 기사는 <조선일보 >가 남진우와 <문학동네>를 특별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증명해준 것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게다가 이런 왜곡에 대 해 자신을 변호하는 것까지 포기한 채, <조선일보> 인터뷰 거부 원 칙을 지키려는 나의 사진은 왜 허락도 없이 게재하는가?

언론은 공정해야 한다. 그것은 언론이 지켜야 할 최대한의 덕목이 아니라 최소한의 덕목이다. 자신들의 입장에 호의적인 문인의 왜곡을 기사화해 밀어줌으로써,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문인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읽히는 이런 공정성을 결한 기사는 <조선일보>가 어 느 정도로 정당성을 결하고 있는 신문인가를 역으로 드러내보여줄 뿐이다.

(Geist.co.kr에서 발췌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