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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 예술 ◑

박서원과 나희덕의 시 대비 / 노혜경

by sang-a 2007. 3. 8.
그 완벽한 세계는 정말 멀지 않을까?
--박서원 시집 <이 완벽한 세계>, 나희덕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 노혜경
1.
두 시인의 시집을 같은 지면에서 논한다는 것은 쓰는 이의 의도와는 별개로 늘 일정한 형식적 긴장을 초래하는 일이 된다. 원고지 몇십 매라는 규정된 세계에서 두 시집이라는 주민이 택할 수 있는 생의 형식이란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말하자면 둘이라는 것은 대립의 수라는 것이다. 둘이 사랑의 수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란 둘을 함께 품는 더 큰 세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경우이니, 세계가 둘만의 것으로 좁혀진다면 사랑도 또한 투쟁이 되는 것은 사이비 예술가라도 아는 일이 아닐까. 그런고로 나는 이 글을 어차피 대립의 논리에 따라 써 나갈 수밖에 없겠는데,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이 글의 선험적 형식이 주는 긴장을 적절히 수용할 만큼 두 시집이 대조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는 말도 된다. 또 다시 말해서 박서원과 나희덕이란 표지는 대립적인 세계의 형식을 구축할 수밖에 없는 내용물들이란 말도 된다. 실로 그렇기도 하다.
작년은 유난히 눈부신 시집들이 많이 탄생했던 해이다. 더구나 그 대부분이 여성들의 시집이라는 것도 놀라운 점이다. 몇 권만 거론해 보아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김혜순의 <불쌍한 사랑기계>는 여성적 주제가 소수문학의 지위를 넘어 주류로 편입되고 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어 주었으며 이경림의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는 진정한 재능은 언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의 한 모범적 예라 할 만하다. 하마트면 잃어버릴 뻔했던 김옥영이 비록 재간행 시집으로나마 돌아온 것도 중요한 사건이겠다. 이 가운데 김정란의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반드시 주목할 만한데, 첫번째로는 이 시집이 수사학을 "버리고" 인식의 언어로 이행하는 모험을 두려울 정도로 감행해 버렸다는 점이다. 운명과 맞서는 영혼만이 형식을 빚을 수 있다고 한 루카치의 말을 실물로서 보여준 셈이다. 두 번째로는, 김정란의 이 시집을 전후로 하여 우리의 시는 루비콘 강을 완전히 건너와 버렸다는 점이다. 이제 시인은 두 부류로 갈린다. 스스로를 텍스트화하는 시인과 세계가 제공하는 텍스트를 기록하는 자.

박서원과 나희덕의 존재는 바로 이 루비콘 강과 관련해서 바라볼 때에 그 진정한 중요성이 드러나게 된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흔히들 생각하듯 선택가능한 하나의 스타일이 아니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바로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2.
박서원의 시세계를 일별해 보는 데 그의 세 시집의 제목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도 없어요>에서 <난간 위의 고양이>로, 그리고 <이 완벽한 세계>로 이어지는 선은 시인이 어느 시공간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선명히 보여주는 표지들이다. 자신의 존재가 이방인인 세계, 모든 것이 외출해 버린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를 구축하고자 애를 쓰던 시인은 어느새 날렵한 고양이처럼 난간을 오른다. 망설임, 그리고 추락의 위험을 극복한 고양이는 이쪽저쪽을 조망하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그는 선택당한다. 난간을 넘어가기로. 그리하여 '이 완벽한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박서원의 시가 한 편씩 놓고 볼 때에 어지럽고 해독불가능한 것처럼 보임에도 전체적으로 이토록 선명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거친 가설이긴 하지만, 시인들에게는 성숙이라는 목표와 관련하여 중요한 장소의 표지가 등장하곤 한다. 정지용이 바다에서 산으로, 그것도 아홉 단계의 상승을 감내하며 백록담으로 나아간 것이나 강은교와 김혜순이 다같이 도달했던 낯선 별이나, 이경림이 산 채로 불에 굽히는 무당이 되기 위해 헤매던 네거리나, 또는 식민지 하의 시인들에게 그토록 빈번히 나타나곤 하던 절벽이라는 이미지를 상기해 보면 알 일이다. 그러한 특별한 장소는 대개는 일정한 넓이를 지닌 공간이지만, 최근의 시인들에게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이 장소가 하나의 선, 즉 경계라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난간, 입구. 벽. 이 이미지들은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으로 결합한 이미지, 어쩌면 이미지라고 할 수 없는 이미지이다.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는 경계에 대한 이처럼 가파른 인식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의 부름에 불려가 부딪친 결과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특히 그러한 경계가 난간이라고 상정할 때, 이 난간이라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그 장소가 단순히 안과 밖의 경계가 아니라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의 경계라는 점이다. 경계를 돌파한다는 것은 강은교가 <허무집>에서 예감한 대로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김정란이 말한 바 '잔혹한 외출'이며 내 식으로는 한밤중의 '행복한 산책'이다. 박서원의 세 번째 시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처럼 위험한 지대를 선택한 자가 도달한 '완벽한' 세계의 초상이다. 잔혹함이며 덜거덕거리는 행복이며 망가짐이지만, 결코 역설적 의미는 아닌 완벽함.

박서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불완전한 세계를 풍자하거나 아이러니칼하게 패로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난간을 넘어간 어떤 장소, 다만 난간 이쪽의 세상과 빈틈없이 겹쳐져 있을 뿐인 장소이다. 그 세계--그는 이 세계라고 부르는--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아직 이 세계로--그의 견지에서는 저 세계인--오지 않았을 뿐이다. 이 세 번째 시집은 그러니까, 두 번째 시집을 통해 자기 속에 억압되어 있던 진정한 목소리를 회복시킨 시인이 이제 그 목소리가 들어가 살 몸--집이라 해도 좋고 방이라 해도 좋지만, 박서원에게는 몸이 먼저다--을 구성하기 위한 투쟁의 파편들이라 할 수 있다.


☆ 그의 두 번째 시집 말미에 들어있는 <門으로 가는 길>이란 시를 보자.

적막,//모든 육신의 뚜껑을 열고/모든 소리를 들어야 하리/나뭇잎 세포가 시들어가는/ 떨림까지도//말갈퀴는 고요히 눈보라치고/마부는 눈이 멀어/마을로 가는 입구는 넓다/이 모두를 잿더미로 끌어안고//적막,/모든 목소리를 들어야 하리

박서원은 멸망해 가는 마을의 입구에 있다. 그 마을이 왜 멸망해 가는가라는 질문은 부질없다. 그의 시집 전체가, 이미 우리가 의지해 온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거듭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잿더미의 마을을 시인은 눈먼 마부에 의지해 찾아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은 나가는 문이 아니라 들어가는 문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저"세상이 아니라 "이"세상이기 때문이라는, 이 특이한 동사들의 행렬은 비단 박서원에게서만 발견되는 현상은 아님에 주목해 둔다.)
두 번째 시집에서 "영원한 현재"에 처해진 자아의 모습을 충실히 증언했던 시인은 이 세 번째 시집에서는 서사의 욕망을 느끼는 것 같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라는 강렬한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이 욕망은 '가문'이라는 기묘한 이미지를 통해 실현된다. 뿌리뽑히고 허물어지고 유린당한 존재로서의 정당성은 이제 가문의 투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정당성으로 이행된다.

집 안의 기둥이 송두리째 조각나고/내 주먹이 박혀 찢어진다//섬에서 섬으로 가는 내 핏줄들은/유배지에서 때늦은 저녁식사를 하고//전등불은 두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게 하도록/민들레처럼 낮게 낮추어놓았다//빈약한 젖가슴에 손내미는 겨울과/발길질하는 봄/새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먹이를 찾아 날아다니고/자맥질로 떠오르는 물방울//지켜보았었다/아주 오랜 발길을 지켜보았다//칼 빼들고 덤비는 자손은/나의 때이른 노래/지켜가야 할 막, 그렇다 幕이 오르는/무대 고함보다 힘껏 다시/기둥을 박아야하는 집 한 채//나는 멀리 사방이 내다보이는 창을/원한다//허약한 선조의 펀치가/나를 살도록 내버려두었다/비록 주먹들의 울분이 피 흘릴지라도--<백년 동안의 가문>

이러한 "탐욕의 가문"은, "칼 빼들고 덤비는 자손"과 "펀치" 날리는 선조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 "기둥이 조각난" 집이다. 선조에게서 후손으로 결코 유순하게 이행하는 법이 없이, 칼과 주먹과 펀치로 더욱 강건한 자손만이 살아남는 기막힌 가문이다. 이 시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가문이 지시하는 바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박서원이 역사에 대한 인식을 가문이라는 말을 통해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문이라는 말에는 원래 여성의 자리가 없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지독히 가부장적인 언어의 한복판에 자기 자리를 설정하고, 더구나 무너지려는 가문의 기둥을 다시 박고, 사방이 내다보이는 창까지 원하는 그는 명백히 역사에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고 나서는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탐욕의 가문 때문에>) 담아야 하는 법. 이러한 피튀기는 싸움을 통해 그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자 한다. '얼굴'을 얻고자 했던 앞의 시집들에서의 화자와 비교해 보면 이 차이는 두드러진다.

이러한 의식은 과연 시집 곳곳에서 나타난다. 맨 처음에 실린 <꿈으로 내려가는 길>은, 표면에 드러난 외디푸스적 욕망과 이면에 흐르고 있는 아버지의 역사에 인지되고 싶은--굳이 말하자면 상징계의 언어로 편입되고 싶은--욕망의 길항 사이에서 미적 긴장을 획득한다. 궁극적으로는 '깊은 바다, 심해'로 '흐르고' 싶은 욕망은, 아버지의 인지가 있어야만 실현 가능하다. 왜냐하면 현대는 아직 아버지의 법이 생겨나기 전이었던 원시 모계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 또는 딸이 됨으로서 비로소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여성들의 뿌리 깊은 질곡이라면, 그 아버지의 내밀한 탐욕을 더한 탐욕으로서 뒤집어버리는 이 시인의 가문은 명백히 "탐욕의 가문"일 수밖에. 장차 이 '아빠-아버지'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는바, 가장 극적인 것은 아버지가 곧 문이라는 인식이다.

자, 이리 온//내 귀여운 노새//나는 너를 門이라고 생각했었다//알고 있니? 지금 반란이 일어나고 있어/많은 사람들이 네 유혹의 자물쇠를 이기지/못했고 내 질긴 탯줄, 내 노새, 나도 너에게/홀렸었다//그러나//자, 이리 온//내 귀여운 아가//맨주먹인 나에게 너는 위대한 가문/전통//너는 내 담요에서 포근히 잠자고 있다//한 손엔 장난감을 들고/알겠지?/너는 나를 버리지 못한단다/나는 내 생명 속에서 너를 키웠다/갈망의 바퀴에서,//자, 이리 온/내 사랑스런 방울새/너는 무한히 자유롭다// 내 바다 속에서/ 나는 너를//산책한다--<낫을 든 남자에게>

이 시에서 아버지는 아가로 변주된다. 이것이 아빠의 변형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위대한 가문이라는 사실에서부터이지만, 여기서 화자는 훨씬 적극적으로 아빠에게 개입한다. 손에는 낫-장난감을 들고, 스스로 제 어미로부터 탯줄을 자르려고 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 아기는 아마도 탯줄을 자르지 못한 아기이며, 따라서 이 아기는 명백한 어미의 자식이다. 가문의 어미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는 문 앞에 서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반근대적인 '가문'이라는 언어를 통해 박서원이 성취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거의 명백해 보인다--가문, 즉 역사를 지닌 집, 투쟁과 황소 같은 노역에 의해 이루려는 참 아름다운 이름. 이름을 얻음으로써 그는 문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다 담론의 형식을 갖추어 말하자면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모성의 세계와 근대의 법인 부성의 세계를 보다 큰 여성성의 원칙 아래 통합하려는 시도, 다시 말해 역사를 이어받아 창조하겠다는 시도가 아니고 무엇일까. 다음의 시가 이야기하려는 것도 별로 다르지 않다.

門으로 들어가는 건 쉬웠지/언제나/병정놀이처럼/건전지만 넣어주면 달리는 장난감/기차처럼/아주 아주 쉽지//밖으로 나오려면/밖으로 나오려면//휘돌아가는 길보다/발바닥 더 닳는다/신발끈까지 닳는다/오관의 나사를 다 풀어놓아도/또 조여와서/눈알이 달팽이처럼 튀어나온다//이 세상에/들어가는 門 많고 많지만/헌 스웨터의 보풀을 떼어내며/늙어가는 참 여리고 아름다운 사람/불길한 검은 짐승들이 어른거리는 창을/차 한 잔에 돌아세우며//한겨울 여윈 지붕이/가족들 오순도순 체온으로 품어주니//사람들아/門열고 나갈 때/말라 비틀어진 잡초에게도/미소로 인사나 하고 가기로 하세--<門으로 나오는 건>

물론, 문으로 나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들어가는 일이 모든 폐허와 함께 가는 일이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에게, "문으로 들어가는 건 (오히려) 쉬웠"다는 진술은 역설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해낸 시인에게 이 진술은 과장이거나 역설이 아니다. 이 장소가 문의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고양이가 뛰어나간 쪽이 바깥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여기엔 확실히 한 채의 집이 생겨나 있다. 황량한 폐허에서 온갖 "연장"들을 버려가며 지은 집, 기둥을 다시 박아 세운 집에서, "헌 스웨터의 보풀을 떼어가며" "불길한 검은 짐승"들을 막아주는 따뜻한 지붕이 있는 방에서 살아버리기란 얼마나 쉬운 일이었을까. 그러나 거기서 머문다는 것은 지금껏 그의 외침이 세상에 인지되지 못한 자의 불평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박서원은 문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도달한 곳이 바로 "이 완벽한 세계"인 것이니, 결국 세상 밖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은 한 바퀴 돌아 세상 안으로 퍼져 있는 셈이 되었다.

다만, 세상의 시간은 낮이지만 이곳은 밤이 지배한다. 눈먼 자들은 이곳에서 "꿈꾸면서 꿈꾸지 않"고, "목을 졸리면서 환하게" 보고, 그리하여 개종한다. 이제 "지팡이 없이도 출구를" 열 수 있다.(<이 완벽한 세계>) 단 한 사람이 못박히면 인류가 들어올려지는 영원한 속죄의 의식을, 박서원의 넘쳐흐르는 언어가 치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쇠창살 같은 담금질"을 겪고, "살이 해와 달을 비틀어 넘어가"는 고초를 견뎌낸 다음(<삼각형>), 바로 <어떤 황홀>의 세계가 말해주는 바의 착란을 견뎌낸 다음, "혼자"가 되고 그리고 "완전히 되돌아온"다. 이제 "땅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집의 마지막은 의미심장하게도 배를 노저어 오는 수녀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린다. 강은 여기서 불타오르는 땅의 이미지이며, 아버지는 곡괭이로 강을 파고 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이미 가문을 차지하려는 투쟁에서 패배한 선조이다. 마지막의 저항이, 배 밑바닥을 뚫고 올라온 엑스칼리버가, 거대한 팔루스가, 낡은 천막에 둘둘 감겨 버린다. 그리고 수녀는 배마저도 버리고 물 위를 걷는다.(<수녀와 배>) <꿈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내비친 아빠의 법에의 경사는, 끝까지 간 영혼이 혼자 걷는 길로 마감된다.

잘 조직되고 서사화된 이 시에서 박서원은 저간의 고초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원에 이르게 하고 싶다는 명백한 소망을 드러내며, 그것은 신성과 여성성의 결합을 통해서라는 인식을 선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공동체의 구원이라는 인류애적 소망이 반드시 루비콘 강을 건너가는 일과 결합해야만 하는 것일까.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시인들이 있는 반면, 또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다고 답하는 시인들도 있다. 나희덕의 시집을 통해 그 대안을 읽는다.

3. 나희덕의 세 번째 시집을 대하는 나의 의문은, 그런데 자아가 충분히 개별화되지 않고서도 공동체의 대표성을 지닌 일원이 될 수 있는 걸까라는 점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과 박서원, 나희덕이 모두 어떻든 기독교적 세계관의 언저리에서 살아왔으니, 이러한 질문이 얼마나 고전적인가를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다시 말하면 이 질문은, 개인 구원이 먼저냐 집단의 구원이 먼저냐 라는 해묵은 논쟁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형식 논리적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적어도, 나희덕은 초기에는 명백히 후자의 태도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진정한 내면의 응답에 입각한 것이었나를 묻기엔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80년 광주의 상처가 거의 원죄처럼 자리한 386세대에게 이 망가진 세계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일은 얼마나 절실한 의무였던가를 어쩌면 나 자신, 너무 잘 알고 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의 실천과 실천의 문학이 등가인 현실 앞에서, 나는 이미 주어진 나로써 충분히 하나의 무기가 되어야 하던 것이었다. 허나 이제 그 스스로, "그곳이 멀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그곳"이 어디인가를 물어봄으로서 앞의 논쟁에 대한 그의 답변을 들어볼 차례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새도 죽을 때는/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새들의 지저귐을 따라/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어느 겨울 아침/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새 한 마리//넓은 후박나무 잎으로/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 주었다

새들이 "마지막 날개를 접는" 그곳, 마음을 다하여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고 다만 그곳의 현세적 표지인 새의 주검에 예를 바치는 시인의 초상. 여기서 그곳이란 논의의 여지 없이 죽음 너머의 세계이다. 나희덕은 사람이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을 1연과 2연의 동어반복을 통해서 거듭 강조함으로써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가 자신의 새로운 화두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중요성을 내포하는 사실이다.

80년대적 문학담론을 통해 지적으로 우리가 이루어낸 것이 사실은 서구적 19세기의 확립이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해서 그것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부르주아에 반대하기 위해 부르주아를 발명해야 했던 것이 아닌가? 또, 저 도저한 헤겔적 이성의 승리가 문학을 농경사회적 사유의 틀 안에 얌전히 묶어둘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억압의 토대 위에서나 가능했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80년대 문학에 대한 비난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 와서 아쉬운 것은 외부의 억압 못지 않게 두려운 내적 억압에 대항하는 문학의 목소리가 너무 가늘어 하나의 문학사를 형성하지 못한 것, 그리하여 모더니스트들의 모든 미적 저항을 단지 어지러운 수사적 놀이로만 치부하고 여전히 외적 세계의 해석에 매달리는 문학들이 너무도 견고한 카논을 형성하게 된 점들이 80년대의 문학적 어둠으로 남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문학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19세기적 이성이 철저히 외면해 버린 죽음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비단 나희덕 뿐 아니라 탈현대라는 우리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문학적 조건에 해당한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나희덕의 행보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버림받은 대지의 딸인, 그리하여 스스로 가문을 일으키고자 한 박서원 들이 아니라 전통적 어법으로 말을 하고 전통적 방식으로 사유하는 유서깊은 가문의 따님이기 때문이다.

시집의 거의 첫머리에 있는 이 시에서 그는 죽음 너머로 뻗쳐 가려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보여주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너머로는 가지 못한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아직 이성의 논리가 인준한 언어들이기에, 그리하여 죽음 너머의 것에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죽은 나라의 사물들에 이름붙여준 일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신중하게도 그 사실을 과거시제로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더욱 암시적으로 "그곳이 멀지 않다"라고, 현재 시제로 제목을 붙임으로써 그곳에 대한 갈망이 잠시 유보되었을 뿐이며 이제는 그 갈망을 현재화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그 무수한 길도/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사랑에서 치욕으로,/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나의 생애는/모든 지름길을 돌아서/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푸른 밤>

너에게로 가고 싶다는 갈망, 그리고 푸른 밤길을 혼자 걷는 일, 이 명백한 표지를 오독하기가 오히려 쉽지 않다. 어떤 절대적 존재로까지 치켜올려진 너는 치욕과 사랑을 다함께 주는 존재이며 밤을 통해, 별의 표지를 따라 찾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죽음 너머로 여행하는 일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의 주검을 성지로 봉하고 경배드림으로서 은폐하려 한 과거의 습관이 그의 발목을 쉽사리 놓아줄 리가 없을 것이기에, 아마도 오래 망설이고 오래 흔들려야 하리라. 과연 나희덕은 조심스럽게 내민 그곳에의 갈망이 진정한 갈망일까를 오래 의심한다. "살아서 심장에 흙이 묻을 수 있다니,/그랬다면 이 버려진 사과처럼 행복했을까 괴로웠을까". 그는 오히려 그것이 이제는 잃어버린 과거, 유년의 낙원에 대한 헛된 향수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나일론 양말들,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그런 저녁을 밝혀줄 희미한 불빛에게/나는 묻지, 네 가슴에도 칸나는 피어있는가, 라고."

그러나 의심해야 하는 것은 갈망 그 자체가 아니다. "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 가 닫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 마음의 뻗침,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걷는 그 가지 않으려 함, 바로 그 발목잡힘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희덕은 죽음 저 너머로 가고자 하는 갈망을 일종의 현실도피적 삶의 태도라고 해석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이 아니라 고통과 대결한다. 고통은 파생된 것에 불과한데도. 다행히 그의 시인적 자질은 그가 갇혀있는 시적 언어의 한계를 넘어가고 있다. 과연 <고통에게 1>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굽이 몇 번은 만난 듯도 하다/네가 마음에 지핀 듯/울부짖으며 구르는 밤도 있지만/밝은 날 유리에 이마를 대고/가만히 들여다보면/그러나 너는 정작 오지 않았던 것이다//어느 날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와서/쐐기풀을 한 짐 내려놓고 사라진다/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마술에 걸린 듯 수의를 위해 삶을 짜 깁는다//손 끝에 맺힌 핏방울이 말라 가는 것을 보면서/네 속의 폭풍을 읽기도 하고,/때로는 봄볕이 아른거리는 뜰에 쪼그려 앉아/너를 생각하기도 한다//대체 나는 너를 기다리는 것인가/오늘은 비명 없이도 너와 지낼 수 있을 것 같아/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말해도 좋은 것인가//제 죽음에 기대어 피어날 꽃처럼, 봄뜰에서.

'나'는 고통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왜 기다리는가. 그것은 고통이 열두 벌의 쐐기풀 수의를 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통을 이기는 것은 그것이 구원을 위한 인고이기 때문이라는 메시지, 그 구원을 위해 나는 손 끝에 피맺히는 아픔 말고도 침묵이라는 형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준비되어 있다는 고백, 내가 그것을 감당해 낸다면 열두 백조 왕자들은 마술에서 풀려날 것이기에, 그리고 그 순간 나도 화형대의 불에서 구원받을 것이기에. 이 속죄양에의 의지는 아름답다. 그리고 분명하다. 그는 고통을 구원에 이르는 도정, 바로 잘 치러낼 때는 죽음을 잘 통과하게 하는 길로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보기에 이 인식은 거의 무의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는 제대로 해석되지 않은 침묵이라는 표지가 나를 불안하게 하며, 둘째로는 그의 바로 다음 시인 <고통에게 2>에서 죽음은 삶이라는 고통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는 표지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희덕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의 고통에 대한 해석 못지 않게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그 두 말이 이 시집의 주제일 수도 있다고 보인다. 그러한 침묵을 이해할 수 있는 표지로서 그가 인용한 백조 왕자의 동화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법에 걸린 오빠들을 구원하기 위해 무덤가의--죽음을 거름 삼아 자라난-- 쐐기풀을 뜯어다 수의를 짜는 공주는, 사실은 왕국의 왕비이다. 문제는 그녀가 낮과 언어의 질서를 무시하고 밤과 침묵의 질서를 선택한 데 있다. 왕국은 자신의 행위에 침묵하는 그녀를 견디지 못하고 화형대에 붙들어맨다. 그녀의 혐의가 단지 말하지 않음 때문이었을까 라는 점을 의심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쐐기풀로 짜는 옷이 침묵보다 덜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옷을 짜는 것을 허락한다. 다시 말해 그녀의 불행은, 그들에게 자신의 일을 말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은 그녀가 말보다 행동을 중시하는 사유의 소유자임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마 나희덕도 언어와 행동을 별개의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방금 전의 해석과 닮아 있다. 그는 언어가 행위의 뒤에 온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쐐기풀 옷을 짜는 동안에는 말할 수 없다고, 침묵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조 왕자의 어린 누이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곧 침묵인 것이다. 왕은 자신에게 미지의 기호인 그녀를 데려다가 자신의 법 안에 가두려 하지만, 그녀는 침묵으로서 왕의 법을 피한다. 이때 침묵은 적극적인 언어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들리지 않는. 침묵은 단지 언어의 결핍이 아니라,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기호인 것이다. 고통은,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하며, 고통을 통해 우리를 짓누르는 말의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말들을 가져오는 통로로 주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시인에게 체험이 언어의 형식으로 현재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열두 벌 수의를 완성할지는 모르지만 왕자들을 사람으로 돌려 놓는 데는 실패할 것이다. 공주는 열두 벌이 아니라 열한 벌 반의 옷을 하늘에 던져 왕국의 대낮을 감히 침범한 저주받은 흰 새들을 구원했으므로.

언어와 체험의 이 미진한 분리는, 그가 아직 80년대적 사유의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반증일까. 아니라면 그는 아직도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을 수행하기엔 우리의 삶이 충분히 형식화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쨌든 이러한 분리는 이번 시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어떤 항아리>를 통해 결정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건 금이 간 항아리면서/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손가락으로 퉁겨 보면/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물을 담아보아도 괜찮다//그런데 간장을 담으면 어디선가 샌다/간장만 통과시키는 막이라도 있는 것일까//너무나 짜서 맑아진,/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그의 감식안//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시라는 항아리

시라는 것은 결국 언어의 진수가 아닌가. 그럼에도 시가 생생한 삶의 즙액인 간장--고통의 알레고리--을 담기엔 허약한 그릇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고통이 부여하는 침묵과 대결하여 침묵을 언어 속으로 이끌어들이려 하기보다는 주어진 말 바깥의 것을 여전히 침묵 속에 남긴 채 견디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에게 시는 인생보다 덜 소중해진다. 삶과 시가 미묘하게 분리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의 문제는 언어와 시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실천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시가 루카치가 말하는 바 영혼의 형식이 된다는 건, 시가 항아리가 아니라 어떤 모양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간장을 들이부어도 견디는 어떤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이미 주어진 형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시란 금간 항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스하고 사랑이 넘쳐나고 겸손한 그의 시가 위로는 될지언정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침묵을 여전히 침묵으로 내버려두려 하는 일, 박살이 나더라도 간장을 들이부어야 한다는 것을 망설이는 일. 세상 밖으로 쫓겨난 침묵--말없는 왕비--를 구원해 주는 것은, 그 침묵의 행위를 해석함으로써 그녀를 세상 안에서 살게 할 의무를 다하는 시인의 몫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입구에서 뒤돌아온다.
나 그곳에 가지 않았다/태백 금대산 어느 시냇가에 앉아/조금만 더 올라가면/남한강의 발원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나 그곳에 가지 않았다//어린 시절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휘장 너머 하느님의 옷자락이 보일까봐/눈을 질끈 감곤 했던 것처럼/보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힘이 내 발을 묶었다//끝내 가지 않아야/세상의 물이란 물, 그/발원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기에,/흐리고 사나운 물을 만나도/그 첫 순결함을 믿을 수 있을 것 같기에,/간다 해도 그 물줄기 어디론가 숨어/내 눈에 보여지지 않을 것 같기에,/나 그곳에 가지 않았다/골지천과 송천이 만나는 아우라지 쯤에서/나는 강물을 먼저 보내고/보이지 않는 발원을 향해 중얼거릴 것이다//만나지 못한 것들이 가슴을 샘솟게 하나니/금대산 금용소,/가지 않아서 끝내 멀어진 길이여/아직 강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물줄기여--<발원을 향해>

안타깝게도 나희덕은 미지를 신비화된 상태로 놓아두기로 결정한 것 같다. 이름을 얻기 전의 물줄기는 그의 가슴을 샘솟게 하는 것이기에. 오, 그러나 바로 그 물줄기에게 물어보라. 시인의 가슴을 샘솟게 해 주려고 존재하는 물도 있다는 말인가. 어떠한 타자도, 동일자를 위해서만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나는 나희덕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재고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빠져 있는 것은 단정함이 아니라 단지 낡은 언어의 함정일 뿐이며, 미지를 용납하려 하지 않는 총체성의 함정일 뿐이다. 그는 "그곳"에 가야 한다.

4.
겉으로 드러나는 표지만을 보아도 박서원과 나희덕은 여러 모로 대조적인 시인이다. 두 시인은 비슷한 시기에 등단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각기 시집을 내 이제 세 자녀를 둔 시인들이 되었지만, 박서원이 첫 시집을 낸 뒤로도 오랫동안 '아버지'들의 관심권 바깥에 머무는 無名 과 無明의 시절을 견뎌야 했다면, 나희덕은 대개의 여성시인들이 당하는 상대적 불이익의 수준을 감안하고 본다면 충분히 인지되고 사랑받았다. 박서원의 첫 시집이 "아무도 없"음, 즉 세상 밖으로 또는 자기 안으로 유배된 자의 치열한 자기 확인에 바쳐졌다면 나희덕의 첫 시집은 "뿌리" 즉 근원에 보내는 겸손한 찬미의 경향을 띠었다. 박서원은 세계의 총체성이나 동일성을 믿지 않는(질서는 누수되게 마련이라고 믿는) 해체주의자이고 나희덕은 질서와 균형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리얼리스트이다. 박서원은 근대를 존재의 문제로 보고 언어 그 자체와 맞부딪침으로써 근대성의 국면을 통과하고자 한 시인이고 나희덕은 근대를 사회학적이고 정치경제학적 토대에서 파악하여 모순의 인식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려 한 시인이다. 이제 세 번째, '삼각형'의 균형점에 이르러 박서원은 "세계"로 돌아오고 나희덕은 "그곳"으로 가려 한다.--정말 그곳에 가려하는가는 이미 보았듯이 아직 유보되어 있지만.

박서원과 나희덕의 대립성은 결국 언어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박서원에게 언어는 진정 말씀의 집이지만, 이때의 말씀이란 로고스가 아니라 들판의 돌에 신전이라 이름 붙인 인간들을 위하여 그 돌에 와서 살아주는 신의 사랑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말함으로써 존재를 얻는다. 나희덕에게 언어는 세계의 재현이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가치를 준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여기 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온갖 잡동사니들의 방이 있다. 박서원은 이 방의 모든 사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종류의 시인이며, 나희덕은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물들을 '쓰레기들' 속에서 찾아내어 그 방을 쾌적하고 살만한 곳으로 다듬는 종류의 시인이다. 박서원은 자기가 발명한 언어들이 외국어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어법과 문법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고, 나희덕은 '단정한 기억'의 기록자가 아니라 '혼란스러운 현재'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드리고 이 두 시인이 처한 어려움은, 우리들 모두가 어떤 지점에서든 함께 겪는 수고라는 점에서 이 두 시인이 지치지 말고 끝까지 해내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왜냐하면, 길을 잘 아는 자의 옷자락에 매달려 가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가장 쉬운 길임을 내가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