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고전 산책로 ◑

고조선의 역사 3.4.5

by sang-a 2007. 3. 8.

3.사람들

 

 고조선은 예(濊)·맥(貊)이라는 종족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발전시킨 나라이다. 예맥족은 한반도와 요령성 및 길림성 등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으로서, 고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화인 비파형동검문화를 형성, 발전시켰다. 중국의 여러 사서에는 예맥족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일찍부터 우리민족이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예맥족은 초기에 중국 요령성에 있는 요하유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을 건국하였고, 이후 지역적 분화를 통하여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져 주변 민족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발전시켰다. 중국의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는 고조선을 구성하는 중심 종족으로서 ‘예맥조선’이 언급되어 있고,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부여와 고구려의 선주종족이 예맥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이들 종족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동예, 옥저, 삼한, 백제, 신라 등 여러 나라의 중심적인 지배집단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민족 형성의 근간이 된 종족은 고조선 사람들인 예맥족과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을 구성한 한족(韓族)이라고 할 수 있다.

 

4,정치와 경제

 

고조선은 제정일치적 통치체제와 8조금법 등의 법제도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존속기간이 긴만큼 정치 및 사회적 단계 또한 변모하여 왔는데, 비파형동검단계에는 적어도 군장사회까지는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지고, 세형동검단계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간에 국가단계에 진입하였던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

고조선 전기의 정치형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후기에 접어들면 이미 중앙통치 조직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박사(博士)·경(卿)·대부(大夫)·상(相)·대신(大臣)·장군(將軍) 등이 있어서 왕을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통치력이 중앙집권화 되지는 못하였고 공동체적인 요소가 적지 않이 남아 있었다.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집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일정 범위에서 작용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각 집단은 내부적으로 자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 중에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닌 이들이 있었으며, 자신의 의견이 왕에 의해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일탈하기도 하였다.

고조선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일찍부터 상당히 발전된 상태에 놓여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은 고조선이 중국 내지와 북방의 다른 집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자기만의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과 요령지역이 이른 시기로부터 잡곡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경제단계로 돌입하였다는 것 및 주변지역과 다양한 교류를 행하였다는 것에서 입증된다.

특히 위만조선 시기에는 중국의 한(漢) 나라와 주변의 여러 나라 사이의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으며, 연(燕)나라에서 만든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명도전은 중국 북경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고조선 주민들이 주변의 여러 종족과 함께 명도전을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5.사회

 

고조선은 적어도 위만조선 대에는 계급사회인 국가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시기에는 이미 왕성, 관료조직, 군대, 계급 등의 요소가 모두 확인되고 있다. 위만조선의 국가로서의 성장은 중개무역과 군사정복에 의해 강화되었는데, 중개무역은 한나라와 위만조선 및 위만조선 주변의 여러 집단 사이에서, 군사정복은 위만조선과 그 주변의 진번과 임둔과 같은 소국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통치중심인 왕성으로는 왕험성이, 관료로는 상직(相職)이, 군대로는 장군 휘하의 최소 10,000여명의 군사가 있었다.


위만조선 이전에는 기원전 4세기대 왕과 대부 및 군사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기록이 희소하여 더 이상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단,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전국 연나라와의 전쟁이 있기 전 고조선이 요하유역의 어딘가에 있었고 이 일대에 비파형동검문화 관계 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므로 약간의 추론을 할 수는 있는데, 기원전 8~6세기 요하유역에서 군사와 제정 및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을 다량 부장하고 있는 무덤과 유물구성이 단촐한 무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군장사회까지는 분화 발전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 위만조선 전후의 것으로 여겨지는 8조금법중 3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였고, 사람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 배상하였으며,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예로 삼되 용서 받으려면 50만전을 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고 여자들은 모두 정조가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 금법을 통해 고조선 사회가 일정한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였고 최하층으로서 노예가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고전 산책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의 국가형성  (0) 2007.03.08
고조선의 역사 6.7  (0) 2007.03.08
고조선의 역사 1.2  (0) 2007.03.08
고조선 역대 제왕  (0) 2007.03.08
면백구년  (0) 2007.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