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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고구려의 국가형성

by sang-a 2007. 3. 8.
[특별기고 9]고구려의 국가형성
[국정브리핑 2004-08-16 16:00]

예맥(濊貊)과 고구려

우리 민족과 고구려의 기원․형성은 같은 알타이어족(Altai語族)에 속하면서도 퉁구스ㆍ몽골ㆍ투르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하나의 독립된 민족단위로서 예맥(濊貊)과 지접 관련 된다. 특히 고구려는 이들 예맥 가운데 압록강(鴨綠江) 중류 유역 일대의 맥(貊)계 주민집단에 의하여 세워졌던 것이다.

국가형성 전의 고구려사회
B.C. 3세기 이래 고구려의 국가형성 이전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에서 적석총(積石塚)을 축조하던 맥계 제 세력집단 그 자체 혹은 그들의 존재양태를 '고구려사회'라 한다.

B.C.1000 후반 이후 중국 동북지방 철기문화의 진전과 함께 요녕(遼寧)동부ㆍ갈림(吉林) 지방에서는 토광묘(土壙墓)가 예맥계 제 집단의 기본 묘제로 광범위하게 확산ㆍ정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3세기 이래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의 맥계 주민들은 적석총이라 일컬어지는 지역적으로 특화된 묘제를 자기 집단의 기본적 매장관행으로 삼아 그것을 집중 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 적석총의 집중적 축조라는 돌출현상은 이 시기 이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 응집력이 눈에 띄게 제고되고 있음을 뜻하였다. 따라서 당시 중국인들은 이들을 ‘구려만이(句麗蛮夷)’라 부르며 주목하게 됐다.

당시 이 지역에는 대략 12~18 개 가량의 ‘나(那)’ 혹은 ‘국(国)’이라 불리우던 군장사회수준의 지역집단들이 나름대로 자기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면서 상호 제휴ㆍ갈등관계를 진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계속되는 한(漢) 및 부여(扶余)의 세력 침투 기도 그리고 말갈(靺鞨) 및 선비(鮮卑)의 발호라는 가중되는 외압과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내부 상쟁으로 인하여 이곳 주민들 사이에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난국에 대한 돌파구로써 국가형성이라는 정치적 통합과정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집단의 정치적 존재양식은 고도의 복합적 정치적 조직체(polity)인 ‘국가’ 수준까지 고양됨을 계기로 해 그 삶이 질ㆍ양 면에 있어 종래와는 차원을 달리하게 되는 까닭이다.

고구려국가란 이 지역 일대에 존재하는 여러 군장사회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그것이 주위의 다른 것들을 힘으로 정복,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뚝서게 된 고도의 복합적 정치적 조직체였던 것이다.

영웅들이 세운 나라


그런데 이러한 고구려의 국가 형성을 주도한 집단은 B.C. 1세기 후반 송화강(松花江)유역 부여 내부의 권력 갈등에서 벗어나 남하해 온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 이끄는 기마 전사집단이었다. 이들이 짧은 시간에 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선진적인 부여에서 체득하게 된 정치ㆍ경제ㆍ군사 등 여러 역량 상의 상대적 우월성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들의 최초의 정착지는 압록강 지류인 혼강(渾江)중류 유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県)일대로 파악된다.
국가형성을 위해 내딛은 추모왕의 첫 발걸음은 그의 영웅으로서의 편모를 유감 없이 드러내 보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후대의 고구려인들이 그를 ‘천제지자(天帝之子)’ 혹은 ‘일월지자(日月之子)’로 신격화해 기리게 된 까닭도 이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아들이며 국도를 압록강 유역의 현재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으로 옮긴 유리왕은 조상숭배를 제도화해 국가의 지배이념을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고:박경철 (강남대학교 교양교수부)

(출처: 코리아 헤럴드)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78&article_id=0000003385§ion_id=001&menu_id=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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