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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고구려자료. 장수왕릉의 비밀 3.

by sang-a 2007. 3. 8.
장수왕릉’ 위에 올라서 동쪽을 바라보니 무덤에서 10여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다듬어진 돌들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작은 돌무덤이 보였다. 동행한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에 따르면 ‘장수왕릉’의 ‘제단’과 ‘딸린무덤’의 흔적이라고 한다.

 

동북쪽의 작은 무덤은 장수왕릉과 50여미터 간격을 두고 존재했던 5개의 딸린무덤 중 하나다. 장수왕릉의 딸림무덤 중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나머지 4개의 무덤은 겨우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딸린무덤’이란 주가 되는 무덤 주변에 작은 크기로 만들어진 무덤으로 배총(陪塚)이라고도 부른다. 지안 지역의 고구려 왕릉 중에서는 유일하게 ‘장수왕릉’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양식이다.
‘장수왕릉’의 딸린무덤은 밑변의 길이가 9.2미터에 이르는 작지 않은 규모를 갖고 있어 고구려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발굴된 ‘제단’은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장수왕릉’의 앞과 뒤를 확실히 구분시켜 줘 그동안의 논란을 잠재웠다. 제단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묘실’이 있는 서쪽 방향이 능의 앞부분이라는 주장과 함께 그 앞에 ‘광개토태왕비’가 있으므로 이 무덤이 ‘광개토태왕릉’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제단이 발견되면서 무덤의 앞 쪽이 동쪽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와 같은 주장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동북쪽의 ‘딸린무덤’을 가까이서 살펴보니 ‘장수왕릉’의 축소판이었다. ‘딸린무덤’은 ‘방단계단적석묘’형식, ‘거대 자연석’, ‘기초다지기’, ‘그랭이공법’, ‘홈파기’, ‘들여쌓기’ 등 장수왕릉에서 발견되는 특징들을 모두 발견 된다.

 

‘딸린무덤’의 서쪽부분은 세월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있는데, 이곳을 살피다 보니 ‘장수왕릉’의 내부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서쪽부분을 통해 드러난 ‘딸린무덤’의 내부모습 중 묘실 부분은 길쭉한 돌이 양쪽 기둥을 이루고 있고 그 위로 얇고 평평한 대형 돌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마치 원시시대 고인돌과 같이 보인다. 이 고인돌 문화가 발달해 만들어 진 것이 적석묘 형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린무덤’은 왕을 모시던 시종들이나 첩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아직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장수왕릉’ 정상에 올라 광개토태왕비와 태왕릉 너머로 한눈에 들어오는 통구평야를 바라 보니 고구려의 ‘영광시대’가 그려졌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를 경영했던 동아시아의 대제국 고구려.
독자적인 천하관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룩했고 강대한 군사력으로 경제력을 거머쥐었으며 강대국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력을 펼쳤던 나라.
고구려의 모습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그리는 이상 국가다.
고구려인들의 힘과 진취적 기상이 깃든 대륙의 땅에서 오늘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