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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고구려를 빛낸 10개의 명장면 ( 1 )

by sang-a 2007. 3. 8.
고구려를 빛낸 10개의 명장면 ( 1 )



1. '하늘'과 '물'의 정령 주몽왕

북부여 땅을 탈출하여 추격하는 병사들을 따돌리며 내달리는 주몽 앞에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치고 있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숨 고를 틈도 없이 주몽은 활로 수면을 내리치면서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고 하백(河伯: 강의 신)의 외손자다.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라"고 외치자, 물고기와 자라떼가 일제히 떠올라 다리를 놓았다. 주몽이 건너자 이들은 다시 흩어져 추격하는 병사들은 건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하늘'과 '물'의 정령이 결합된 주몽은 왕자(王者)로서 초능력을 부여받았기에 시련을 통과하는 불사신의 신체를 획득하였다. 그랬기에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그의 사망을 하늘이 황룡을 보내 맞아갔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주몽은 고구려 건국을 위해 하늘의 대리자로서 지상에 내려왔고 그 사명이 끝나자 원향(原鄕)인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몽왕의 도하설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 고구려인들에게는 긍지의 원천이기도 했다.

2. 사냥터에서 즉위한 미천왕

흉노의 묵특 선우가 가을의 대규모 수렵대회를 이용해서 부왕을 살해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고구려에서 수상격인 국상 벼슬의 창조리도 그 기회를 이용하여 거사했다.

창조리는 가을에 폭군인 봉상왕이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 나갔을 때, 따르던 무리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내가 하는대로 하라"면서 갈댓잎을 모자 위에 꽂았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일제히 그렇게 하였다. 모자 위에 꽂는 갈댓잎은 일치의 상징으로 결사를 도모할 때 서약으로 이용되었다.

무리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 마음이 일치한다고 확신한 창조리는 즉각 사냥터에서 봉상왕을 감금한 후 폐위하고 왕손인 을불(乙弗)을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400년간 중국의 식민지였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미천왕이다.

사냥터는 때로는 왕위 계승이라든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장소였거니와, 또 그와 같은 기능은 유목사회적 전통이었다. 고구려의 역동성을 확인해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3.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조(396년)에 의하면 광개토왕이



직접 이끈 수군은 지금의 한강인 아리수를 건너 백제 왕성을 급습해서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백제왕은 영원히 비천한 노예가 되겠다고 광개토왕에게 맹세하였다.

아울러 백제왕은 남녀 노예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 그리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볼모로 바쳤다. 광개토왕은 나아가 백제의 58성과 700개의 촌락을 확보하였다. 광개토왕은 조부인 고국원왕이 백제군에 피살된 지 25년 만에 완벽하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19세의 광개토왕이 한강 유역에 처음 진출해서 백제를 압박한 지 4년 만에 일단의 결산을 보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58성의 소재지는 대략 예성강에서 임진강선과 남한강 상류 지역으로 추측된다. 특히 백제로부터 확보한 남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와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이라는 원대한 남진(南進) 구도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는 이때 보급-수송 루트인 소백산맥 이북의 충주와 단양, 제천을 비롯한 강원도 내륙 지역을 장악했다. 영락 6년의 백제 정벌은 고구려 남진 경영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4. 중국의 왕을 살해하다

북중국의 강자인 북위(北魏)의 공격을 받아 멸망 직전에 있던 북연왕(北燕王) 풍홍(馮弘)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장수왕은 436년에 북위의 반대와 협박을 묵살하고 병사들을 보내 풍홍을 구출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풍홍이 망명객이 되어 고구려에 오자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馮君)이 야외로 행차하느라고 군사와 말이 피로하겠습니다"라고 조롱하였다. 장수왕은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황제처럼 행세하며 교만하게 굴자 시종하는 인원을 대폭 줄이고 그 태자를 볼모로 잡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풍홍은 남중국의 유송(劉宋)으로 망명하려 했다. 유송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풍홍을 자국으로 보내라고 요청했지만, 장수왕은 오히려 풍홍과 그 손자 10여명을 죽였다. 아울러 장수왕은 풍홍을 맞으러 왔던 유송의 병사 7,000명도 생포하여 유송으로 압송하였다.

고구려의 눈치를 보던 유송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투옥했다. 남북조인 북위와 유송 사이에서 당당하게 처신하는 고구려의 자주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장면이다.
 
 


 
 
 
5. 국제적인 강국의 면모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선을 넘어 북중국의 북위와 대치하고 남쪽으로는 금강과 영덕을 잇는 선까지 내려왔다.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까지, 동쪽으로는 두만강 하구에 다다랐다. 즉 장수왕은 475년에 한성을 함락한 후 백제를 금강 유역까지 밀어붙였고 신라 땅에는 병력을 주둔시켜 강력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게다가 고구려는 유목국가인 유연(柔然)과 더불어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소재한 거란족의 일파인 지두우(地豆于) 분할을 시도하였으니 그 영향력은 몽골 고원지대까지 미쳤다. 이러한 배경 위에 484년에 북위에 파견되어 온 사신의 서열을 보면 남조인 남제(南齊)가 1위, 고구려가 2위를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전역에서 북위 및 남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책부원귀]에서 고구려의 강성과 관련해 이 구절을 언급했다. 489년에는 북위에 온 남제 사신이 고구려 사신과 동급으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으로 항의할 정도였다. 고구려의 국력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