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모수(解慕漱)는 B.C 239년에 고구려(高九黎)를 건국하여 다음 해 B.C 238년에 왕검조선을 멸망시키고, B.C 232년에 멸망한 왕검조선의 잔류세력인 오가(五加) 회유에 성공하여 전에 왕검조선의 진한(辰汗)이 관할하던 지역을 장악한 후 만백성의 추대를 받아 단제(檀帝)가 되었다. 이때부터 해모수계(解慕漱系)가 4대 동안 고구려(일명 북부여)를 통치하였다.
그 후 B.C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다음 해 요하(遼河) 동쪽 고구려(高九黎) 지역을 점령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을 때, 동명(東明)이 일어나 한나라 군사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세력을 얻어 B.C 86년에 해모수계(解慕漱系) 무리들을 백악산아사달(장춘)의 동쪽에 위치한 가섭원(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이때부터 동명계(東明系)가 2대 동안 고구려(일명 북부여)를 통치하였다.
그 후 B.C 58년에 고구려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가 죽고 고주몽(高朱蒙)이 유언에 따라 대통(大統)을 이었으나, 고구려를 장악하지 못하여 무리를 이끌고 비류수상류(혼하상류)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다.
B.C 58년에 고구려의 대통 싸움으로 동명계(東明系)가 다스리던 고구려가 분열되자 현도군이 다시 요하(遼河) 동쪽 지방을 점령하여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골본(忽本:심양)을 점령하였고, 이때 골본(忽本)에 남아 있던 무리들 중 일부는 한나라에 복속하였고, 일부는 장춘 방면으로 북상하여 북옥저(北沃沮)라 불리었으며, 길림 방면의 동부여(東夫餘)는 독립세력으로 변하여 동부여왕(東夫餘王) 대소(帶素)는 대왕(大王)을 칭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혼하상류로 이동한 고주몽 무리들이 고구려(高句麗)로, 길림 방면의 동부여(東夫餘)와 장춘 방면의 북부여(北夫餘)는 부여(夫餘)로 적혀 있다.
기원전 1세기경 다섯 부족을 중심으로 하여 초기 국가를 이루었던 고구려는 안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넓혀 갔다. 그리하여 기원후 1세기 말엽의 태조왕때에는 고대왕국으로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태조왕은 지금까지 중국 세력과 다투면서 기른 국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영토 확장에 힘써 옥저를 무찔러 함흥지방을 확보하고, 요동 진출을 꾀하였다.
이러한 국가 체제의 정비는 그 후 더욱 진전되었다. 고국천왕 때에는 종래의 부족 표시였던 계루부.소노부 등 5부를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로 개편하여 행정 구역을 정비하고, 형제 상속의 왕위 계승 제도를 부자 상속으로 고쳤다. 왕위의 부자 상속제는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음을 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