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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고구려를 빛낸 10개의 명장면 ( 2 )

by sang-a 2007. 3. 8.
고구려를 빛낸 10개의 명장면 ( 2 )
 
 6. 안장왕의 로맨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에 보면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포함되는 왕봉현(王逢縣)과 달을성현(達乙省縣)이라는 2개 고을에 관한 기록이 잡힌다. 그런데 왕봉현과 달을성현 항목에는 이례적으로 짤막한 지명 유래가 담겨 있다.
왕봉현은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지역이라 왕봉으로 불렀다"라고 적어 놓年? 달을성현은 "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올리고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기 때문에 뒷날 고봉(高烽)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날 고양시에 우뚝 솟은 고봉산의 봉수가 그것이다.
안장왕은 6세기 전반기에 재위한 고구려 제22대 국왕이다. 그는 남순(南巡)하여 한강 하류의 북안인 지금의 고양시 부근에서 한씨 미녀를 만나 일종의 로맨스를 남겼던 것 같다. 그랬기에 임금이 누구를 만났다는 뜻을 담은 '왕봉현'이라는 지명으로 그 사연이 실낱같이 전해지게 되었다. 냉혹하게만 느껴졌던 고구려왕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7 . 온달 장군의 전사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1년)의 사위로 전해지는 온달 장군은 고구려가 절치부심하던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해 출정을 자원했다.

그는 떠나면서 "계립현(문경 새재의 동쪽에 위치한 하늘재)과 죽령(풍기 북쪽에 위치한 고개) 서쪽을 우리 땅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고구려 군대를 이끌던 온달 장군은 신라 군대와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으로 짐작되는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온달 장군의 관을 운구하려는데 땅에서 옴짝달싹 않은 채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비보를 접하고 내려온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관이 땅에서 떨어졌다고 [삼국사기]의 온달전은 전하고 있다. 비장하게 느껴지는 이 장면에는 서약의 중요성과 국토 수호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다.

8. 물귀신 된 수나라 30만 대군
수양제는 612년에 1백13만여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보급 부대까지 합치면 무려 3백만명에 이르는, 세계 전쟁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규모였다.

이때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에 가서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는 그 허실을 살피고 돌아왔다. 이후 을지문덕은 추격해 오는 수나라 군대에 거짓 패하여 수나라 군대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30리 되는 곳까지 이르자 을지문덕은 "신통한 전략은 천문(天文)을 꿰뚫고 기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하였네, 싸움에서 이겨 공로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라는 내용의 오언시(五言詩)를 보내 적장을 희롱하였다.

수나라 장군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을 핑계 삼아 회군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러 반쯤 건넜을 때 후미를 급습하였다.

수나라 장군 신세웅을 비롯한 전군이 궤멸되었다. 30만5천명의 수나라 군대는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하루낮 하룻밤에 4백50리를 도망간 것이었다. 이들이 요동에 이르렀을 때 생환자는 겨우 2,700명이었을 정도로 참담하게 패했다.

9.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
귀족인데다 체구가 당당하고


성품도 호방한 연개소문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영류왕과 모의하여 그를 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낌새를 포착한 연개소문은 642년에 반대파 귀족들을 초청한 후 주연장을 덮쳐 200명에 가까운 귀족들을 참살하였다. 이어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살해하고 그 조카를 왕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최고위직인 막리지가 되어 전권을 틀어쥐었다.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어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는 말에 오르고 내릴 때면 귀족이나 장수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대오를 갖추었다. 앞에서 길라잡이가 긴 소리로 외치면 길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달아나면서 구덩이도 피하지 않았다.
가위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였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직접 당나라 장수 방효태와 그 아들 13명을 비롯해 전군을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연개소문은 당태종이 보낸 사신들을 토굴에 감금하기까지 하였다. 송나라 신종은 그러한 연개소문을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했다.

10. 당태종도 손 든 안시성 전투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한 당나라 군대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해성(海城)에 위치한 안시성을 포위하였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안시성주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굳세게 항전했다.

당나라 군대는 60여 일 동안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높은 흙산을 쌓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성을 공격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하루에도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사흘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안시성주는 성 마루에 올라와 손을 모아 절을 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당태종은 비록 적군이지만 그가 성을 잘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비단 100필을 선물하였고 또 임금 섬기는 절의(節義)를 격려하고는 황급히 철군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 명목상의 이유는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연개소문을 응징한다는 것이었다. 안시성주는 그러한 연개소문에게도 굴하지 않은 지사였다. 당태종의 야욕을 좌절시킨 안시성의 전승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위상도 올라갔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