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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산책로 ◑

사설시조 감상/耕春麥

by sang-a 2013. 7. 12.

살구꽃 봉실봉실 핀 밧머리에

이라이라 하는 져 농부야

 

 

이 무슨 곡식을 시무랴고 봄밧을 가요

예주리 천자강이 홀아비콩 눈끔적이 팟

녹두 기장 청경차조 새코깨르기 참깨 들깨

농부 쥐눈이 참수수를 갈랴하나

그 무엇슬 스무랴 하노

 

 

그것도 저것도 다 아니오

구곡 장진 신곡 미등할 때에

제일 농량이 긴한 봄보리 가오

<耕春麥1918. 조선문예>

 

 

 

1910년경부터 창과 시 양면에서 사설시조가 한창 인기를 끌던 때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잡지에서 사설시조를 많이 올리던 때였다. 이는 1920년대 시조 부흥 론이 대두되던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카프계열에서 시조문학에 태클을 걸었을 때 시조 부흥을 내세우면서 연작을 쓰자고 했지만 그 보다는 내용의 현대화를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아니면 그냥 놔두었더라면 사설시조가 전환기의 대행을 맞으면서 시조문학의 양상은 사뭇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흥론 이 후에도 발표된 연작을 보면 복고적이거나 낭만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학을 받아들이면서 모더니즘의 다양한 문학양식을 시조문학에서는 수용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작가 역시 선비풍의 수업을 받아온 작가 군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서민문학 사설이 자리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더구나 그 때는 외침으로 인하여 국운이 풍전등화로 위태로운 때였으며 붓을 들고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고도로 발달된 작품을 통하여 궐기 할 때였다.

결국 문학이라고 하는 글이 갖출 수 있는 내용이나 형식 같은 카타르시스는 선비문학 보다는 평민에서 확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 작품은 사설시조의 수법이나 취흥이 제대로 된 작품이다.

밭갈이 하는 농부를 구경하고 있는 객이 온갖 곡식 이름을 다 대면서 아는 체 떠벌리는 잔소리가 야단스럽고 익살스럽다.

대답을 하는 밭 임자는 그런 곡식은 다 자취를 감추고 없으니 춘궁기에 빨리 곡식을 얻을 수 있는 별것 아닌 보리를 심는다고 했다. 묻는 사람 머쓱해진다.

밖으로 나타난 수작은 그렇지만 개화를 하네 신학문을 하네 하고 수선을 떨며 야단이지만 우리 것을 지키지 못 하는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고

농사 지어봤자 공출로 다 빼앗기고 보면 어려운 고리고개를 맞는 것 밖에 없다는 비아냥이기도 하다.

 

한편 이 작품의 형식을 보면서 사설시조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에 어느 정도는 답을 얻을 수 있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사설시조 역시 단시조와 마찬가지로 글자 수를 갖고 따질 일이 못 된다.

더구나 사설시조에서는 글자 수를 갖고는 논할 수가 없으며 초 중 종장의 각기 독립된 의미구조를 확대 해석 하는 것으로 시작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 장 마다 책임지고 있는 시조로서의 입장에 충실해야 하며 그런 의미상의 협력관계는 단시조처럼 서로 조응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비록 말이 길어졌지만 분명한 장의 구분 속에서 통일된 한 편의 시조가 완성되는 독특한 장르라고 하겠다.

 

사설시조를 두고 자유시라고 하는 말은 시조문학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이라 하겠다.

시조는 자유로워야 하면서 자유시가 될 수 없는 것이 현대시조의 과제라 하겠다.

사설시조는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논의 되어야 할 줄 안다.

         - 참조 : 한국문학통사.권4.조동일

출처 :김문억의 시조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 김문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