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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가면 더 좋다 ◑/산

소금장수 길 이야기

by sang-a 2015. 10. 23.

 

짜고 눈물나는 발자취, 그 길에 서려 있네
무등산 소금장수길·지리산 뱀사골 간장소
전라도닷컴
기사 게재일 : 2012-07-24 06:00:00

 ‘소금장수가 똥싼 마을’이라는 내력이 전해지는 마을이 있다.

 함평 대동면 상옥리 옥동마을.

 “우리 마을이 길긴 기요. 어찌나 길던지 옛날에는 소금장수가 모퉁이 돌문 끝인줄 알고 놈의집 변소 빌려 쓸 생각도 않고 마을 끝에서 볼일 볼라고 참았다가 결국엔 옷에다 똥을 싸부렀답디다.”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마을이 하도 길어 생긴 이야기. 옥동마을은 철성산 자락을 따라 마을이 길게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함평 ‘똑다리’(고막천석교)까지 큰 배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지도나 암태도 같은 곳에서 배에 소금, 파래 등을 싣고 온 사람들이 그 짐을 이고지고 곡식 많은 옥동마을까지 걸어왔더란다. 먼 길 걷다보면 당연히 볼일도 봐야할 터인데 이 마을이 그렇게 긴 줄 모르고 이 모퉁이 돌면 마을이 끝이겠거니 하며 참고 참다 똥을 싸버렸다는 것.

 산자락 아래 유별나게 길게 이어지는 마을의 모양새가 ‘똥싼’ 정황에 실감나게 담겨 있어 웃음난다. 그런데 곤혹스런 일을 당한 주인공은 왜 하필 소금장수일까.

 아마도 바닷길 강길 논둑길 고갯길 산길 마다않고 걷고 또 걸어 이 땅 두루두루 발길 닿지 않은 곳 없었던 등짐장수의 대표격이 소금장수이기 때문일 것.

 사람살이에 소금은 필수. 그러니 사람 사는 곳 어디든 소금장수 발길 닿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땅 구석구석, 수많은 고개 굽이굽이, 소금장수의 애환 새겨지고 전해지는 곳들 많은 이유일 것이다.

 

 무등산 옛길 ‘소금장수길’에 깃든 애환

 소금짐은 부피도 큰 데다 좀 무겁겠는가. 길 위에서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고단한 삶. 무등산 옛길에도 그 자취는 남겨져 있다. ‘옛길’은 이전 사람들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걷는 길이기도 할 것. 무등산 옛길 1구간 중 잣고개에서 청암교에 이르는 길은 ‘소금장수 길’이다.

 고개로부터 시작되는 길이다. 가파름과 힘겨움의 절정으로 치닫는, 허나꼭 ‘넘어야’ 다음의 길이 열렸던 고개. 고개 넘기가 오죽이나 힘든 일이었으면 그 먹고살기 힘든 춘궁기를 ‘보리고개’라 했을까.

 소금장수길이 시작되는 ‘잣고개’ 역시 넘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물고개’라는 또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차로 훌쩍 넘다 보니 요새는 고개인 줄도 모르고 넘는 고개들이 많지만 따복따복 걸음을 보태서 넘어야 했던 시절의 고개 이름들엔 ‘몸이 부대껴낸 길’이 선연히 담겨 있다.

 곡성 석곡면 염곡리에 있는 노치(老峙)는 길게는 곡성과 화순, 짧게는 삼기와 석곡을 잇는 고개. 왜 늙을 노(老)자가 붙었을까. 어찌나 길고 험한지 한번 넘으려면 어느덧 다 늙고 만다 고 해서 노치다. 고생스러움을 과장된 해학으로 눙쳤다. 인근에 있는 보름재란 고개 이름은 또 어떤가. 소금장수들이 이 재를 넘는 데 보름이 걸렸다고 해서 보름재다. 장흥에는 하도 높고 길어서 자울자울 졸면서 넘어간다는 자울재(자올재)가 있다. 그렇건만 고개에 쌓인 옛사람들의 발길과 삶은 이제 자꾸 잊혀져 가고 멀어져 간다.

 소금장수길은 잣고개에서 무진고성(武珍古城) 아래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멀리 바닷가에서 난 소금을 무등산 골골마다 팔러 다니며 식구를 먹여살렸을 소금장수의 노고와 애환이 서린 길이다. 흐르는 땀과 소금물에 속수무책으로 몸을 적셔야 했을 길. 타박타박 걷는 옛길 옆으로는 차들이 씽씽 내달린다. 차로 지나치는 길, 우리는 그 길에 어떤 이야기, 어떤 자취를 남길까.

 영산강을 따라 광주로 들어온 소금을 한 섬씩 지게에 지고 잣고개를 넘어 이곳까지 옮겨다 놓고 무등산 골골마다 팔던 소금장수는 어느 날 그 산길에서 죽었다고 한다. 소금더미 곁에서 숨을 거둔 그를 짠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귀한 소금을 가져다 준 공덕을 기려 그 앞에 절을 하며 지나다녔다는 게 소금장수길의 내력.

 ‘소금장수 묘’라 새긴 비와 북바위를 그 길에서 만날 수 있다. 묘 옆 북바위를 돌로 통통 두들기며 세 번 절을 하면 가파른 산길을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다는 이야기도 보태져 전해진다. 평생 고단한 걸음걸음으로 생을 지탱했을 소금장수가 걷는 자들에게 건네는 위무와 격려인가.

 

 소금가마니 빠뜨렸다는 지리산 뱀사골 ‘간장소’

 목포 산정동 남쪽 바닷가에 있는 ‘갓바위’ 전설에도 소금장수가 등장한다. 이 갓바위는 한 쌍이다. 큰 바위는 ‘아버지바위’이고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라 불리며 둘 다 머리에 삿갓을 쓴 형태다.

 상상력을 부추기는 오묘하고 신비스런 생김새. 이야기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가난하되 효심 지극했던 소금장수 청년의 파란만장한 수난사가 그 바위에 얽혀 전해진다.

 소금장수의 시대는 갔지만, 이름없는 그 소금장수들의 걸음걸음이 낳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길 위에 흐른다. 지리산 뱀사골엔 아예 이름이 ‘간장소’인 곳이 있다. 남원 반선에서 화개재를 오르다 보면 요룡대, 탁룡소, 병풍소 등을 거쳐 이 소(沼)를 만나게 된다. 크고 작은 폭포와 연못이 연이어지는 이 수려한 계곡길은 가을이면 단풍의 아름다움이 각별한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옛날 누군가에게는 고된 행상길이기도 했다. 위엄있게 ‘룡(龍)’자 같은 이름 붙은 소들과 달리 생활밀착형 이름인 간장소에는 소금장수 이야기가 전한다.

 화개장에서 소금가마니를 사서 지고오던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소금을 가마니째 빠트렸다는 이야기다. 옛날에 화개장에서 거래된 소금이나 해산물은 화개재와 뱀사골을 통해 산내나 인월 등지의 내륙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간장소에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걷고 또 걸어 소금가마니 장보따리 져날라야 했던 옛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올 여름 태풍 무이파의 영향으로 등산로가 유실돼 요룡대에서 화개재 이르는 7.2km 구간은 당분간 통제된 상태. 요룡대 근처 마을에 든다. 천년송(千年松, 천연기념물 제424호)으로 이름난 산내면 부운(浮雲)리 와운(臥雲)마을. 해발 750m 고지대답게 마을 이름에 ‘구름’(雲)이 두 번이나 들어간다. 고갯마루 너무 높아 구름도 누워서 지나간다는 와운마을에 사는 공안수(59·‘와운골가든’ 주인)씨에게 옛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여그 산내면이 열여섯 개 부락이고 뱀사골 주위로 있는 부락만 해도 달궁, 덕동, 반선, 와운, 부운 해서 다섯 개 마을이여. 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옛날에는 화개재를 넘어 화개장으로 댕김서 소금 사다 묵었제.”

 화개재는 남원 산내면 뱀사골과 하동 화개면 목통골을 잇는 고개이다.

 “하여튼 밤에 갔다 밤에 와야 해. 컴컴한 새복에 나서서 돌아오다보문 밤이 돼.”

 그 먼 길을 걸어 화개장에서 사오는 것은 거의 소금이었단다.

 “소금 외에는 안 사와. 험한 산길이라 가져오기가 무선께 살 것이 없어. 딴 것은 인월장이나 남원장으로 가서 살 수도 있었제. 근디 소금 살라문 꼭 화개장으로 가. 화개장이 싼께. 왜 싸냐. 바닷가가 더 가까운께. 인월은 가차운 디에 소금 나는 디가 없어. 여수에서 소금이 온께 멀제.”

 소금을 사 나르는 일은 연중행사였다. 더 뜸하게는 2∼3년에 한 번씩 사 날랐다. 고역이었다. 한 번 져 나를 때면 50∼60kg 정도를 지게에 지고 져날라야 했다. 화개재를 넘어 마을까지 오려면 꼭 간장소를 지나와야 했다.

 “쏘 우(위)로 지나와야 헌디 거가 길이 고약시러. 깐딱하문 빠쳐불제. 근께 한두 번 소금가마를 빠치기도 했다고 옛날 어른들 말씀이 그래. 그래서 나온 이야길 거여. 소금을 물에 빠쳐불문 싹 녹아불제. 원통하고 허망하제. 그때는 짚가마니에 소금이 들어 있응께 도리없어.”

 이곳 물이 간장처럼 짜지고 물빛이 간장색을 띠게 되었더라는 이야기는 그런 내력에서 나온 것. “그런 말들은 있는디 묵어보문 안 짜. 그냥 물맛이여.”

 몇 십년 전 이 산골짝에서 소금은 엄청나게 ‘귀한 몸’이었다.

 “지게로 져나를 때는 소금을 엄청 귀하게 생각했제. 얼매나 무겁고 비싼께. 그때는 소금이 아니라 금이여. 쌀보담 귀했당께.”

 공안수씨의 아내 안효덕(58) 아짐은 “시집와서 한동안은 김치 담글 때 배추에 소금을 절여 담그들 못했어”라고 말한다. “소금이 귀한께. 절이들 못하고 배추를 씨꺼갖고 그냥 (소금) 쬐까 뿌려서 바로 김치를 담갔제.”

 간장 한번 담가먹을 형편이 안 돼서 소금으로만 먹고 산 사람도 많았다. “이북에서 내려와갖고 여그 맨손으로 들와서 화전해묵고 살던 아재가 계셨어. 그 아재도 그랬어. 간장 한번 못 담가묵었제. 부지런히 약초 캐고 오미자 따고 해서 난중에 돈 벌어서 익산 황등에다 논 사갖고 나가 삼서 농사 지었제. 농사진께 좋다고 그라고 좋아하셨는디 농사 두 번 짓고 돌아가셔불었어.”

 소금가마니 녹고 녹아 짜져 버렸더라는 간장소처럼, 그런 내력들 쌓이고 녹아들어 한 생애 도 짜고 눈물난다. 


남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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