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월류봉 솔티마을을 가다
고향은 어머니 품이다. 바람 한 점, 풀꽃 하나 정겹지 않은 것이 없고 산과 물 또한 넉넉한 가슴으로 받아준다. 타향살이에 잠시 고향을 잊는다 해도 내치지 않고, 지친 몸을 이끌고 낙향해도 그동안의 부재(不在)를 캐묻지 않고 품어준다.
마치 자식의 따뜻한 끼니를 위해 아랫목에 묻어놓은 ‘밥(마음)’같은 존재다. 영동군 황간면 월류봉을 품은 솔티마을(원촌리)이 바로 그런 고향의 원류(源流)다. 이곳에 가면 정겨운 인심과 풍경이 있다. 봄, 여름을 지나며 알알이 씨알을 키우고 있는 포도밭과 감나무들도 반긴다. 솔티마을은 이미 TV속 연예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통해 알려진 곳이다.
KBS 해피선데이 '1박2일'팀의 강호동과 은지원, 이수근, 지상렬 등이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며 천렵과 복불복(福不福) 게임을 하던 곳이고, '해신'의 검객들이 월류정 백사장 앞에서 검술을 겨루던 곳이다.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는 윤은혜와 오만석이 시골 처녀총각으로 나와 풋풋한 사랑얘기를 들려줬다.
특히 '1박2일' 팀의 경우 2007년 8월 5일 첫 회를 이곳에서 촬영했고, 1년 후 다시 찾을 만큼 마음의 고향이 된 곳이다. 여름 휴가지로 산과 바다 못지않게 즐겨 찾는 곳이 강(江)이다. 강폭 가득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면 한여름 무더위는 간데없이 씻겨지는 법이다.(이번 여정은 우희철 사진부장, 강경미·정진영·양승민 편집부 기자가 함께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는 하나의 '카페'다. 그냥 스쳐 지나치는 휴게소가 이렇듯 멋스러운 곳은 별로 없다. 금강의 운치가 더하니 녹음(綠陰)을 벗 삼아 차 한 잔 하는 것도 풍미다. 금강휴게소를 나오면 추풍령 이정표가 나온다. 추풍령은 조선시대 청운을 품고 걸었던 간절한 소원의 길이다. 당시 부산(동래)에서 한양 가는 고개는 모두 3개. 추풍령과 문경새재, 죽령이 있었는데 추풍령은 보름길, 죽령은 열여섯길. 문경새재는 열나흘 길이었다. 선비들 사이에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부질없는 사념이 머릿속에서 칭칭 감돈다.
자동차는 황간 IC서 나와 우회전한다. 여기서 백화산 반야사 쪽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기암절벽과 봉긋 솟은 봉우리가 물과 산을 휘감아 돈다. 마치 중국의 계림(桂林)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런 목가적인 풍경은 논둑길로 이어진다. 감나무와 벽오동 나무가 돌담길 곁으로 고즈넉이 자리하고 누군가가 살았을 빈집의 흔적은 호젓하다. 유년의 땅따먹기, 말 타기, 고무줄, 자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로 고샅을 점령했던 그 돌담길이다. 모든 추억들이 낙엽처럼 복사돼 눈앞에 쏟아진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청신하다. 마을 어귀를 돌아 조금 걸으면 월류봉이 보인다. 금강이 휘돌고 소백산이 병풍처럼 서 있는 땅이다. 도마령의 굽이치는 산줄기와 월류봉의 돌아드는 물줄기가 만난다. 이 초강천은 절대 거칠지 않다. 큰 바위에 떼를 입혀놓은 듯한 절벽 아래로 흐르지만 햇살에 비춘 물여울은 부드럽다.
한천팔경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던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이름을 따왔다.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이자 주자학의 대가였던 송시열은 봉림대군의 사부로, 우의정까지 지냈지만 잦은 모략과 밀고로 세 번 넘게 낙향했다. 이때 청주와 영동에 내려와 은거생활을 했는데 특히 병자호란 직후인 32세 되던 해에는 월류봉 앞에 은둔하면서 강학을 했다.
월류봉 정자는 한천팔경의 화룡점정이다. 달님도 쉬어간다는 월류봉은 절벽이 공중에 솟아 높고(400.7m) 수려하며 그 봉우리에 달이 걸려있는 정취는 진실로 아름답다. 봉우리를 올라서면 한반도 형상을 닮았다는 원촌리의 풍광을 볼 수 있다.(등산은 월류정~월류봉 산신당~청학굴~전망바위~월류5봉~월류 4,3,2,1봉~삼거리 갈림길, 초강천 건넘(감나무 식당앞)~송시열 유허비~기미정~주차장:2시간 30분 소요).
봄에 진달래와 철쭉으로 산이 붉어지면 홍조를 띤다하여 화헌악(花軒岳)이라 했고, 용연동(龍淵洞)은 월류봉 아래의 깊은 소를, 산양벽(山羊壁)은 월류봉의 깎아지른 절벽을 가리킨다. 이 기묘한 모양의 산봉우리는 동서로 능선이 뻗어 있어 6개의 봉우리가 어깨동무를 한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북쪽은 냇물을 따라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을 이루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월류봉 아래 백사장은 드라마 '해신'으로 알려졌지만 오랜 세월 부서지고 용화된 백사장은 넓고 아늑하다. 이 물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가르는 덕유산 줄기인 삼도봉과 민주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다. 초강천은 물이 맑고 차기로 유명한 물한계곡을 이루고 다시 추풍령 계곡물과 만나 월류봉으로 흘러든다.
월류봉을 곁으로 자그마한 신작로가 나 있는데 솔티마을(원촌리)가는 길이다. 길옆으로 포도밭이 엉겨있고, 시골풍경이 예스럽게 펼쳐져있다. 다랑이(논배미)는 낙폭을 두고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이미 벼는 한 뼘을 지나 어린아이 티를 벗었다. 길은 지루하지 않을 정도이니 짐작으로 500m 길이일 듯싶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추억의 시골길이 생각난다. 추억속의 시골길은 천렵이나 군입정하기에 좋았다. 길 가다가도 아카시아, 진달래꽃, 무, 찔레줄기 등을 따먹고, 더덕이나 도라지, 머루나 달래도 먹었다. 으름, 깨금(개암) 등도 별미였다. 나무 마다 친친 감고 올라선 으름은 석류처럼 쩌억 벌리고 익어 바나나맛이었
다. 겨울 끝자락엔 개밥나무(버들강아지) 열매를 따서 껌처럼 씹었다. 처녀종아리처럼 통통하게 익은 무도 군입질에 좋았다.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달짝지근한 맛은 복분자(산딸기)나, 뽕나무 오디 맛에 버금갔다. 잠시 여름날의 추억이 패잔병처럼 길게 드리운다.
길 옆 포도밭에서는 아낙들이 포도 솎아내기를 하고 있다. 캠벨포도인데 9월 중순경에 포도 따기 체험행사도 하고 구입도 가능하다. 아낙들의 말씨엔 경상도와 충청도의 방언이 녹아있다. 이는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상주가 접경인 탓이다. 타지인이 와서 귀찮게 물어봐도 싫은 내색이 없다. 후박한 인심과 넉넉한 입심이 더해 푸근하다. 50대가 젊은 사람에 속한다고 할 만큼 노동의 대부분은 나이 드신 분들의 몫이다. 가는 길은 수십 굽잇길이 있는 게 아니다. 숲 전체에 그늘을 겹겹이 쌓아 뜨거운 햇볕이 뚫을 틈이 없다.
원촌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앞에 보이는 것이 기룡대(起龍臺)라는 정자와 느티나무다. 이곳이 바로 '1박2일'팀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짓궂은 게임을 하던 장소다. 옹기종기 팔짱을 끼고 있는 마을 곳곳에 감나무가 보인다. 영동은 감나무로도 유명한 고을이다. 영동 읍내의 가로수가 온통 감나무로 가꾸어져 있기 때문에 가을이면 감이 주렁주렁 달린 이색적인 경관이 펼쳐진다. 영동 감은 일명 ‘먹감’이라고도 하는 둥시와 영동월하시가 있다. 2~3개의 씨가 들어 있는 담홍색의 감은 18.5도 정도로 당도가 높아 연시로도 곶감으로도 맛이 좋다.
느티나무 아래로 바람이 분다. 본디 영동은 바람 또한 많은 고을이다. 그런 까닭인지 이곳에는 바람의 신(神)인 영동할미에게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오래 전부터 전해져왔다. 음력 2월 초순에 바람이 세게 불면 나이 든 노인들은 '영동할미가 온다'고 말한다. 마음 착한 관리의 넋이 바람으로 변해 원을 풀려고 한다는 영동할미 이야기는 부패한 현실을 꾸짖는 이야기다.
수십 갈래로 뻗은 느티나무. 줄기는 바람을 따라, 햇볕을 따라 뻗어있다. 마치 곡예사의 흰 밧줄 같다. 나무를 비켜간 바람은 논두렁 쪽으로 튕기듯이 간다. 솔숲이 짙고 솔향이 깊다. 뭐 하나 버릴 것 없다는 '괴목' 느티나무는 냉풍기다. 솔풍이 불어 시원하다. 바람이 맛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더구나 춥지도, 덥지도 않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다. 당일 온도가 30도를 웃돌았는데 정자 아래 체감온도는 20도다. 한여름에 10도면 꽤 큰 차이다. 그만큼 여름에 가기 좋다는 말이다.
정자 아래서 고기를 구워먹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사람이 사는 동네인데도 인간의 때를 타지 않은 자연을 닮아 좋다.
솔티마을엔 2개의 마을공동 민박집이 있다. 지자체에서 2억 원을 지원받아 최신식 2층으로 지었다. 층당 20~30명 숙박은 거뜬할 듯싶다. 이 민박집은 부녀회에서 관리·운영하고 수익금은 마을회비로 쓴다. 1층은 평소에 마을회관 및 경로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마을 부녀회장 송삼순 씨(010-6557-2578)에게 연락하면 숙박 일체에 대해 알려준다. 솔티마을은 녹색체험마을로 지정돼 매년 들국화축제가 열린다.
솔티마을을 나와 다시 초강천에 접어든다. 개울은 물길이 완만하고 얕은 곳이 많아 물놀이하기에 좋다. 천렵을 해도 좋으나 물고기는 많아 보이지 않는다. 처음 솔티마을 여행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천렵이었다. 개울가에서 빠가사리, 동자개, 메자, 꺽지, 꾸구리 등 물고기들을 잡을 생각에 들뜬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파, 깻잎 매운 고추 등을 넣고 매운탕을 끓여먹을 요량이었다. 봄에는 껍죽이와 뚜거리, 여름은 빠가사리, 가을은 모래마주, 왕눈이, 메기, 모래무지 아니던가. 그러나 오른손으로 돌멩이를 들추며 젓가락 휘젓듯 해봐도 물고기는 보이지 않는다. 자꾸 물속이 자욱하게 흐려질 뿐이다.(그러나 물고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닐 게다)
결국 천렵을 포기하고 강호동과 은지원 등이 매운탕을 먹던 월류정 앞 식당에 들렀다. 이곳서 빠가사리(동자개) 매운탕을 시켰다. 물에서 잡아 올릴 때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자개미'로도 불리는데 물 흐림이 느린 강바닥에 주로 살기 때문이다. 어른 손가락 굵기에 길이는 20㎝ 남짓. 얼핏 큰 미꾸라지 크기지만 주둥이가 넓적한 게 다르다. 매운탕으로 끓이면 시원한 국물 맛에 야들야들한 육질이 별미다. 가격도 여느 매운탕집보다 비싸지 않다.
여행의 피날레로 초강천에서 물수제비 내기를 했다. 게임에서 진 사람이 입수하는 조건이었는데 결국 졌고 입수했다. 아련한 추억들이 몸속에서 유영한다. 젖은 몸으로 다시 강가에 앉는다. 거울처럼 투명한 강 위로 햇살이 반짝이고 각기 다른 녹(綠)의 농담으로 이어진 여울의 흐름이 한가롭다. 물고기를 잡지 못해 안달 난 마음은 이내 수그러든다. 그 한가한 풍경에 몸을 녹인다. 달 밝은 밤에 망탑(기룡대)에 오르면 천지의 기운이 온 가슴을 적신다 하니, 언젠가는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월류봉에 오르리라는 결심도 한다. 사람은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 타향으로 간다'고 했다. 고향으로 온 여정은 타향생활을 잠시 잊게 했다. 동시에 타향을 그립게도 했다. 고향을 보며 귀향을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여정을 끝내며 또 한번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나재필 기자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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