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물길따라 문인들 풍취 넘쳐 흐르다
전통경관 중 구곡과 팔경의 차이점 중 하나는 선과 면이다. 구곡은 어느 특정한 계곡을 따라 오르내리는 선을 중심으로 설정되는 반면 팔경은 그렇지 않다. 팔경은 어느 한 지역을 중심으로 해 구곡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설정되며, 선의 개념보다는 면의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이름 자체도 지역 명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여주의 경우는 독특하다. 여주에 설정된 팔경은 여느 것 들과 다르게 하나의 선을 따라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주가 처한 자연 지리적인 조건 때문이다.
▲ 정수영 작 ‘한강·임강유람사경도권’ 중 신륵사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여주는 강원도 원주와의 경계인 강천면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남한강이 경기도 양평과의 경계인 금사면을 빠져 나갈 때 까지 여주를 남북으로 가르고 있다.
그 강은 여강(驪江)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자연지리적으로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선사함은 물론 비옥한 토지의 근원이 됐으며, 인문지리적으로는 팔경을 낳았다.
그런가 하면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금사면으로부터 여주읍에 이르는 강변에는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의 별서들이 수두룩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가장 살기 좋은 지역으로 꼽기도 했다.
그러니 자연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여주의 아름다운 풍광들은 강을 따라 형성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팔경을 설정한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팔경 중 대개 6곳 이상이 여강을 중심으로 한 곳들이다. 그러니 앞에 말했듯 마치 구곡의 설정처럼 여주팔경은 여강 물줄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됐던 것이다.
황려(黃驪)·여흥(驪興)이라고 불렸던 여주 일대의 팔경 중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목은 이색(1328~1396)이 노래한 <금사팔영(金沙八詠)>이다. 그 후 사가정 서거정(1420~1488)이 지은 것이며 소요재 최숙정(1433~1480)은 서거정의 시운을 차운해 <여주팔영(驪州八詠)>을 지었다. 그 중 <금사팔영>은 금사면 일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며, <여주팔영>은 그나마 여주읍을 중심으로 한 읍치를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종송 작 ‘움직이는 산-신륵사’ |
서거정이 지은 <여주팔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강(驪江)·나룻배(渡舟)·팔대수(八大藪)·벽사(甓寺)·마암(馬巖)·영릉(英陵)·청심루(淸心樓)·연사(烟寺)이다. <해동지도>에 팔대장림(八大長林)이라고 기록된 팔대수는 청심루와 마주보는 강 건너에 조성된 인공 숲이었다.
또 벽사는 조선 초 보은사(報恩寺)라고도 불렸지만 지금의 신륵사로 불리는 절이다. 그 절에 벽돌로 만든 탑이 있어 벽절 혹은 벽사로 불렀으며, 마암은 신륵사 건너편 옛 여주관아의 관문이었던 영월루가 옮겨진 아래 강변의 바위를 말한다.
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청심루는 현재 여주초등학교 자리이며 누각은 강변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이들 중, 그 장소가 모호한 연사를 제외하면 세종대왕릉인 영릉만이 강과 인접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영릉 또한 강과 그렇게 많이 떨어진 곳은 아니다. 다만 강에서 영릉이 보이지 않고 영릉에서 강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일 뿐 엎드리면 코 닿을 만큼 강과 지척이다.
그러니 여주팔경은 남한강을 따라 그 주변에 형성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인문환경의 아름다움을 아우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여강팔영(驪江八詠)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서거정의 <여주팔영> 중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노래한 <벽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긴 강물은 흰 비단 폭을 쏟는 듯하고 長江瀉疋練
한 오솔길은 강가를 따라서 났는데 一徑緣江湍
내가 예전에 벽사를 찾아가 보니 我昔訪甓寺
지경이 깨끗해 속세 같지 않았네 界淨非人間
보제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르는데 燒香普濟眞
오랜 세월에 구름은 장 한가롭구나 歲月雲長閑
백련사를 결성하기도 전에 未結白蓮社
먼저 영취산에 당도하였네 先到靈鷲山
우리 이 목은 노인이 생각난다 懷我李牧老
옛 비갈에 이끼가 얼룩졌구려 古碣苔斑斑
위에서 말하는 보제(普濟)는 나옹(懶翁)스님을 일컫고, 백련사(白蓮社)는 중국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이 402년에 결성한 극락왕생의 정토신앙을 축으로 하는 염불수행의 단체를 말한다. 또 이목노(李牧老)는 <금사팔영>을 노래한 이색이다.
▲ 여주 신륵사와 여강 풍경 |
그러니 유람을 떠난 사대부들은 배에서 나루터에 내려 곧장 신륵사로 오르곤 하였는데 나옹스님의 화장터였다고 알려진 강월헌이 있는 바위인 동대(東臺)에 배를 대고 오르기도 했다. 사대부들이 신륵사를 찾는 것은 그들이 불법을 구하는 것이 아닌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려는 것이 일반적이었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에게 강가에 돌출된 큰 바위인 동대는 신륵사에서 가장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달밤에 동대에 앉아 여강에 비치는 달빛을 바라보는 것을 풍류의 하나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일부러 신륵사를 찾던, 아니면 배로 여행하는 도중에 찾아가던 간에 신륵사는 그 어떤 곳 보다 손쉽게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그 누구 보다 배를 많이 이용한 사대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충주의 선영에 오가던 어느 날 동대에 올라 그림처럼 당시의 모습을 잘 묘사했는데 <신륵사 동대에 오르다(登神勒寺東臺)>와 밤에 <신륵사 앞에다 배를 대고 동대에 오르다(夜泊神勒寺登東臺)>이다.
장우성 작 ‘잔월’. |
이처럼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여주를 찾아 다양한 시편들을 남겼지만 여주의 옛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것은 흔치 않다. 그 중 지우재 정수영(1743~1831)이 1796∼1797년에 걸쳐서 한강과 임진강 지역의 경승을 그린 <한강·임강유람사경도권(漢江臨江遊覽寫景圖卷)>에 보이는 여주 읍치 그리고 신륵사와 동대부분만 강조한 장면이 가장 돋보인다.
그림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당시 강월헌은 없었는지 그림 속에 보이지 않지만 보물 제 226호인 다층전탑·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3호인 삼층석탑·보물 제 230호인 대장각비까지 자세하다. 더구나 강의 나루터에서 신륵사로 오르내리는 길까지 뚜렷해 당시의 교통수단까지 암시하고 있다.
-글=이지누 ‘경기 팔경과 구곡: 산·강·사람’ 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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