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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협행사 ◑

종로문인협회 문화유적 답사

by sang-a 2019. 2. 18.

 

새해들어 첫 번째 문화유적 답사가 있었습니다.

 

지금

서울대 병원 자리부터 마로니에 공원 일대까지

옛 함춘원 ( 조선시대 창경궁의 정원 ) 지역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2월 중심부에 선 날임에도 바람도 매섭지 않았고 햇살도 적당하였습니다.

넓은 서울대 병원 자리 곳곳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 자취를 더듬으며

궁궐 정원에서 자란 근대 의학의 거목을 엿봅니다.

 

 

 

 

 

경모궁 ( 景募宮 )

비운에 승하한 사도세자의 혼령을 위한 궁이으로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 본관 뒤에 있습니다.

영조 때 사도세자가 죽은 후 이곳에 사당을 짓고 ' 수은묘 (垂恩墓 )라 했고 정조가 즉위하자 곧 수은묘를

경모궁 (景募宮 )으로 격상시켰다 합니다.

정조가 한 달에 한 번 아버지를 참배하기 위해 창경궁에서 경모궁으로 가는 길목에 월근문 (月覲門 )과 일첨문 (日瞻門 )을 새로 지었으며

고종황제가 사도세자를 장조 (藏祖 )로 추증하면서 이곳에 모셨던 신주를 종묘로 옮기고 나서

영희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합니다.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죽은 사도세자

영조 때 이곳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 수은묘 (垂恩廟 )'가 들어섰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영빈 이씨의 소생입니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승하한 7년 후,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태어났으며

2세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0세에 혼인 후,

15세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13년 동안 대리청정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762년 2월에 왕세손 (정조 )의 가례가 있었고, 5월에 액정별감 (掖庭別監 )나상언 (羅常彦 )의 형

나경언 (羅景彦 )이 동궁의 허물 10여 조를 적어 올렸다 합니다.

나경언의 상소는 영조와 홍봉한, 전 좌의정 윤동도가 보고 홍봉한이 불태우기를 청하였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 영조실록 >>과 <한중록 (恨中錄 ) >의 기록 뿐입니다.

 

 

 

 

 

 

 

 

영조실록의 내용에

"네 (사도세자)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끌어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 (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이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질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했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말하려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

  여기에서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은 왕손의 어미는 은전군의 생모인 귀인 경빈 박씨이며 여승은 양제 가선을 말합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홍씨의 회고록으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을 비교적 자세히 적었습니다.

 

 

 

 

 

집복헌(集福軒)과 영춘헌(迎春軒)

집복헌은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고

영춘헌은 정조가 승하한 곳입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둔 후 8일 만에( 윤 5월 21일 ) 

뙤약볕 아래 갇혀 있던 세자가 세상을 등지게 된거죠.

그의 나이 28세. 이 해가 임오년이라 이 일을 '임오화변'이라 하였습니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세자의 호를 회복하고 시호를 '사도세자'라 했으며 장례일에 휘경동 배봉산 아래

사도세자 묘를 찾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14년을 더 살았고 아비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11세의 아들은 25세의 청년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정조입니다.

 

 

 

 

문정전

세월이 흘러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창경궁에서 경모궁으로 가는 곳에 월근문을 내고 경모궁에서 매일 바라본다는 뜻으로

일첨문을 내어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으며

창경궁에는 생부의 사당을 바라볼 수 있는 통명전 뒤 언덕에 자경전을 지어 생모 혜경궁 홍씨를 모셨습니다.

 

 

 

 

현륭원비

정조가 황위에 오른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수은묘를 천장하고 현륭원이라 했는데

그때 세운 비석이다.

융릉 비각 안에 있으며 정조가 친히 어제한 것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처음 남편의 묘를 참배하게 됩니다.

 행차 4일째 상황을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정조는 군복을 벗고 참포(연한 검푸른 색의 상복)로 갈아입고, 검은 물소가죽으로 만든 오서대를 두른 다음

여를 타고 원상으로 올라갔고 두 군주도 뒤를 따랐다.

혜경궁은 특별히 제작한 유옥교라 불리는 지붕이 있는 여를 타고 올라갔다.

울지 않기로 약속했던 혜경궁이 묘소 곁에 설치한 휘장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통함에 겨워 통곡을 했다.

정조 또한 애통함을 금하지 못했다.

정리사들은 혹여라도 혜경궁이 병환이라도 날까 염려하여 행궁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이에 정조는 친히 차(茶)를 어머니께 권해드리고 귀환길에 올랐다.

새벽에 시작한 현륭원 참배는 이렇게 비통한 오열속에 끝이 났다."

  사도세자는 33년 만에 찾아온, 친정을 두둔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한 부인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또,  혜경궁 홍씨의 오열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함춘원 마두봉 언덕에 세운 대한의원

창경궁의 정원이었던 마두봉 언덕에 '대한의원' 이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의료 시설- 궁궐 안에는 (내의원)이 있었고

                                   궁궐 밖에는 (백성의 질병 치료와 구호 사업을 하는 '제생원'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고 백성에게 약을 나누어주는 '혜민서'

                                  가난한 백성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세운 '동서활인원'등이 있었습니다.

1976년에 사적 제248호로 지정되었고.

1978년까지 서울대학교병원 본관으로 사용하다가 본관 건물을 신축 이전하고 나서

현재 ' 서울대학의학박물관'과 '병원연구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궁궐 정원에서 싹이 튼 의료시설이 한국최고의 의학 메카로 성장한 셈입니다.

 

 

 

함춘원의 김소월 옛집

경성부 연건동 121번지는 국민시인 김소월이 남한에 적은 유일한 주소지입니다.

소월의 스승 김억의 출판사 매문사이기도 한데 이곳에 주소지를 둔 소월이 함춘원 동산을 거닐며

시심을 가다듬고 <진달래 꽃> 초판을 펴낸 곳이기도 하다.

종로문협에서는 건물주의 허락을 얻어 김소월 옛집 동판을 부착했었습니다.

이로써 소월이 우리 곁에 돌아왔고 종로의 문인으로 확인된 셈입니다.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나무는 칠엽수입니다.

일제가 일본특산의 칠엽수를 경성제국대학에 심고 마로니에로 속여 왔으며 이를 추종하는 세력 또한

칠엽수를 마로니에라 말해 왔다.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엔 크고 작은 연극극장이 160개나 있는 곳이기도 하여 늘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 이로써 기해년 첫 문화유적 답사를 마쳤습니다.

식사후 지하철 역을 향하여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적당히 햇살 좋은 날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떤 빛깔로 내 하루가 물들었는지 마음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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