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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협행사 ◑

문화유적답사 - 종로 창경궁

by sang-a 2021. 9. 14.

종로의 문화재를 찾아서 - 창경궁을 다녀오다.

 

1. 창경궁 (昌慶宮)의 개관

창경궁은 성종 14년 (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예종비 안순왕후 (安順王后),

덕종비 소혜왕후(惠王后)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 (壽康宮)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은 1418년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 세종이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 (昌德宮)과 연결되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때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 되었고, 광해군 8년 (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 2년 (1624) '이괄의 난과 순조 30년 (1832) 대화재로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보유 문화재현황

국보 1점 -제 226호 명정전

보물 7점 -제 384호 홍화문, 제 385호 명정문과 행각, 제 386호 옥천교, 제 818호 통명,

중요등록문화재 1점 -제 83호 창경궁 대온실

 

1)창경궁 명정전 -국보 제 226호

 

창경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60.4척. 측면 3칸 32.28척에 단층 팔작지붕에 공포는 다포형식을 취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후면에 따로 지은 툇간이 부속되어 있다.

기단은 이중기단으로 이 기단은 지세에 따라 3면에 적석을 한 것으로 전면의 중앙과 북쪽 중앙에 화강석의 계단이 시설되어 있다. 계단 중앙에는 쌍봉을 부각하였으며 기단 장대석을 쌓았고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건물은 이중기단 위에 다시 장대석을 한층 돋음한 지면에 세웠는데 초석은 원형이다. 축부는 16개의 평주와 4개의 고주로

형성되어 있는데, 고주는 전의 전면에만 배치되어 전면이 툇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면의 중앙 3칸은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 툇간은 하단에 적벽돌이 약 12층 쌓여 있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 포작을 평방 위에 밀조 하였다. 제공의 쇠서는 수설, 첨차 뒷몸은 행공첨차 끝처럼 직절, 바닥을

굴리고 그 부분을 초각하여 장혀몸을 따라 도리에까지 솟구치게 하였다.

보 아래에는 첨차를 모두 한 모으로 모아 당초각된 양봉으로 처리했다.

출목사이에는 순각천장을 만들었다.

공포의 짜임새는 대단히 견실하고 쇠서의 곡선은 경직하며 조각 솜씨도 힘차고 긴장미가 있어 조선 초기의 수법을 발견할 수 있다.

가구는 대량이 고주와 뒷면 평주 공포 위에 걸리고 그 위에 종량과 대공이 종도리를 받고 있으나 이 부분에 잡다한 보강재가

혼입되어 있어 종도리와 중도리 사이가 빈 공간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대량 윗몸에 따라 우물 천장이 가설되어 내부에서 보이지 않는다.

처마는 겹처마로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에는 취두, 합각마루 끝에는 용을 새기고 추녀마루에 잡상을 두었다.

이 건물에서는 주간 문비와 광창의 구성이 광해조의 재건 당시의 것으로 근정전. 인정전 등과 같은 모양을 하여 타 궁전 문비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    2016.3.19일

 

 

2)창경궁 홍화문 (弘化門) - 보물 제 384호

혜화문은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도성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창축과 함께 건설되었다. 이때의 문 이름은 홍화문이었다. 그러나 성종 14년(1483)에

세운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문이라도 명명하였으므로 창경궁의 동문 이름과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중종6년(1511)에 혜화문이라고 개칭하였다.

창경궁은 서울의 다른 궁궐과 같이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광해군이 주요 건물들을

중창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과 명정문 그리고 호오하문이 그 때 중창된 건물들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홍화(弘化)의 뜻은 교화, 덕화를 널리한다는 뜻으로 창경궁의 다른 전각들의 이름과

함께 서거정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우고 있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 창덕궁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3) 창경궁의 국보와 보물

창경궁에는 아픈 사연이 많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 때에도 화를 입었다. 숙종 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이야기 등이 창경궁 뜰에 묻혀있다.

사적 제 123호인 창경궁은 일제시대에 창경원이라 격하되어 동물원으로 탈바꿈했었으나 ,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온 겨레의 노력으로 1987년부터 본래 궁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홍화문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명정전,

통명전, 양화당, 춘당지 등이 있으며 구름다리를 통하여 종묘롸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최근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시켜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율곡로 지하차도 건설공사가 진행 중이다.

 

2. 창경궁의 과학 문화재

1). 창경궁 관천대(觀天臺)- 보물 제 851호

서울에는 현재 조선시대에 만든 2개의 관천대가 있다. 하나는 창경궁 안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제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전 휘문고등학교 교지에 있다.

두 관천대는 구조나 크기, 제작 방법이 거의 같다. 창경궁 안에 있는 이 천문관측소는 <서운관지>에

따르면 조선 숙종 14년(1688)에 만들었다.

높이 3m, 가로 2.9m .세로 2.3m정도의 화강암 석대위에 조선시애 기본적인 천체관측 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였다.

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며, 관상감에

세워졌던 초기 또 다른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2) 창경궁 풍기대

창경궁에 있으며 조선 후기(18세기)에 제작되었다. 화강석 재질이며 크기는 길이

225cm, 하부 대석 높이 91cm, 넓이 62cm * 62cm. 상부 팔각주 높이 135cm, 경 43cm이다.

<서운관지>에는 "대궐 가운데에는 풍기가 있는데 이는 곧 옛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으로서,

창덕궁의 통제문 아노가 경희궁의 서화문 안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족을 꽂아 놓았다."라고

기록했다.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풍기대에는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양각한 팔각주를 세운 모양을 되어 있다. 팔각주의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의 길이는 확실치 않고,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풍향기의 구조와 모양은 <동궐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풍기대들은 창덕궁과 경희궁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측우기와 수표가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기인데 풍기는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풍향계이다. 풍향의 측정은

농업 기상학에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관측 자료이다. 풍기에 의한 풍향의 관측은 세종 때부터

제도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표와 같이 처음에는 풍기대를 절의 당간 지주석처럼 만들었을

것이다.

풍향은 방향으로 측정되어 24향으로써 표시되었다. 또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몇단계로 구분되었는데

아마도 강우량의 경우처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 나무가 뽑힐 정도의 바람은 대풍이라 불렀고,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은

가장 강한 것을 폭풍이락 하고, 대풍과 폭풍은 풍이로서 특히 기록되었다.

풍기대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풍양계대로서 그 유용한 관측기의

실증적 유물로 기상 관측기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3. 창경궁 대온실 - 등록문화재 제 83호

대한제국 순종 융희 3년 (1909)에 준공한 온실로써, 건축 당시 한국 최대의 목조구조의 온실이었으며

,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 등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정비 중창공사를 계기로 우리나라 자생난을 중심으로 세계의 각종난을 진열하고

있으나 관리 미숙으로 대부분 고사하고 난대림을 구성하는 자생수종과 초본류 식재 진열하고 있다.

온실 주변에는 자생식물 포장을 마련 하였으므로 봄부터 가을까지 여러가지 우리 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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